꽃 그림자 놀이
나는 캠프 파이어의 절정은 까무룩하니 꺼져 가는 모닥불을 멍하니 바라보는 ‘불멍’라고 생각한다. 불을 멍하니 보면 머리 속이 새하얗게 비워지는 거 같다. 활활 타오르며 “탁탁” 소리와 함께 불티를 날리는 모닥불보다 벌건 숯으로 남아 회색 재를 두르고 화르륵 화르륵 타는 모닥불이 나는 정겹다. 나는 이렇게 시야를 위협하지 않고 잔잔하게 타는 촛불 역시 좋아한다. 허연 가래떡처럼 생긴 양초에 불을 붙이면 초가 녹으면서 눈물을 흘린다. 비라도 오는 날 정전이라도 되면 방마다 양초를 켜 놓고 어둠을 밝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암튼 난 작은 불꽃을 바라보며 불멍하는 걸 좋아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단짝 동무 희순이네 엄마는 화장품 방문 판매를 하셔서 낮에 집을 비우셨다. 나는 거의 매일 방과 후, 희순이네 집에 놀러 가서 숙제를 함께 했다. 희순이네 집에는 <동아전과>라 전과목 자습서가 있었다. 나는 희순이와 함께 자습서를 베끼며 과제를 하면서 한나절을 보냈다. 그날 희순이네 집은 가니, 비가 오는 줄도 모르고 이불 빨래를 한 희순이엄마가 평소처럼 안방 벽에 하얀 호청 이불 걸고 선풍기를 틀어 놓고 외출을 하셨다.
이불 호청 네 귀퉁이를 더 잘 마르라고 식탁 의자 네 개에 걸쳐 놓은 걸 보고, 희순이와 나는 탄성을 질렀다. 완벽한 인디언 텐트였다.
어린애들은 구멍이나 칸막이 같은 공간을 보면 비밀스런 아지트같아 엄청 좋아한다. 우리 둘은 축축한 비누향을 맡으며 이불 텐트 밑으로 기어서 들어 갔다. 비가 와서 날도 흐리고, 천둥 번개까지 치는 바람에 겁도 났는데, 그때 마침 완벽한 타이밍으로 정전이 되서 암흑 천지가 됐다. 이럴 때를 대비해 준비한 양초를 꺼냈다. 우리는 육각모 성냥통에서 성냥을 꺼내 촛불 잔치를 벌였다. 희순이와 나는 국어 시간에 배운 그림자 극장 놀이를 한다고 촛불 그림자에 두 손을 모아 나비도 만들고, 독수리도 만들고, 노래도 부르고 놀았다.
그런데 그때 벽에 걸어 놓은 빨랫줄이 풀리면서 이불 텐트가 무너졌다. 양초도 쓰러지고, 쓰러진 양초는 성냥알이 빼곡이 찬 육각모 성냥갑에 쓰러지면서 불이 붙였다. ‘팡’ 소리와 함께 불꽃은 옥양목 홑천 이불을 태우고 식탁 의자 다리에까지 불이 붙었다. 천만 다행으로 퇴근하고 돌아오신 친구 아빠가 불을 양동이에 물로 불을 잡았고, 사소한 집기들만 끄실리고 우리들의 위험 천만한 불장난을 막을 내렸다. 친구네 집을 다 태울 뻔한 불장난이었지만 난 그날 이불 텐트 속에서 촛불을 켜놓고 불꽃놀이를 하던 황홀함을 잊을 수가 없다.
안민영의 <매화사>을 읽으면서 어른들이 방안에서 매화를 감상하는 꽃 그림자 놀이를 상상한다. 당시에는 선비들은 아름다운 촛불을 켜놓고 매화꽃을 감상하는 꽃그림자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빈 벽에 어른거리는 꽃 그림자와 매화향을 즐기며 선비들은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거문고를 연주했다고 한다. 작은 화로에 솥뚜껑을 올려 놓고 숯불을 피워 즉석에서 소고기를 구워 먹는데 이를 <난로회煖爐會>또는, <철립위鐵笠圍>라고
부른다
.
풍류를 즐기는 금수저들의 풍류를 안민영의
<
매화사
>
에서 엿볼 수 있다
.
'
꽃그림자놀이
'
는
옛 선비들이 즐겼던 풍류 중의 하나로 빈 벽에 꽃 화분을 비추어 그림자를 연출하는 놀이다
.
이때 조명과 화분의 위치 및 방향에 따라 다채로운 형상이 나타나는데
,
참가자들은 그 그림자꽃을 보며 돌아가면서 시를 짓었는데
,
이를
‘
매화음
’
이라고 한다
.
조선 시대 전기의 서화가 강희안은 <양화소록>에서 꽃을 완상하는 법을 이렇게 쓴다.
“초봄이 되어 꽃이 피면 등불을 밝히고 책상 위에 올려 놓으면 잎 그림자가 벽에 도장처럼 찍힌다. 아름다워 즐길만
하다
”
라고
썼다
.
정약용도 <국화 그림자 놀이>에서 “국화를 벽 사이 적절한 곳에 촛불을 두어 밝히게 했다. 국화의 잎, 줄기가 거리에 따라 농담의 차이를 보이면서 한편의 수묵화를 연출하게 만든 것이다.”
겨울에 즐기는 꽃그림자 놀이의 절정은 한강에서 얼음 족가을 가져 와서 구멍을 판 다음에 그 속에 불을 피워 얼음 등불에 비치는 매화를 감상하는 <빙등조매>다.
오늘날 반려 동물을 가족처럼 돌보며 사랑하는 것처럼 옛날 선비들은 반려식물인 매화를 정성스레 가꾸며 꽃그림자놀이를 즐겼다고 하니, 정말 멋스러운 취미인 듯 싶지만, 화로불에 구운 고기 냄새와 술 냄새에 쪄든 매화향기를 온전히 즐겼을까 싶다.
선비들의 충절과 절개를 상징한다고 가르쳐온 안민영의 <매화사>는 어쩌면 매화 사랑을 빙자한 늙은 가객 안민영과 박효관이 벌이는 음주문화로 읽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