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넘게 안 친 베이스를 오랜만에 잡았다. 기말 페이퍼를 쓰는 기간이면 으레 나타나는 현상이다. 지난 학기는 휴학했으니 계산이 딱 맞는다. 너무 오랜만에 쳤더니 왼손의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제외한 셋에 모두 물집이 세게 잡혔다.
나는 물집이 잘 잡히는 편이다. 발도 평발이라 꾸준히 걷기 운동을 하면 발에 계속 물집이 잡힌다. 물집이 잡히면 당연히 따갑고 가끔은 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기도 하지만, 나는 이때다 싶어 물집을 더욱 자극하곤 한다. 성격이 조금 지독한 데가 있는데, 이건 대학교에 입학하고서 베이스를 처음 연습할 때 유독 심했다.
때는 1학년 2학기, 기숙사에 살며 상경경영대학 축제 무대를 준비하던 시기였다. 베이스 자체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악틱 몽키즈를 듣고 샀지만, 고등학교 때는 배드민턴을 치고 공부하느라 연습할 새가 없었다. 사실상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베이스를 들었는데, 쳐 본 사람은 알겠지만 베이스 줄은 보통 굵고 거친 게 아니라서 처음 치면 정말 아프다.
처음 연습하면서 좀 아프면 쉬었다가 다시 치고 하는 게 보통이겠지만, 나는 성격이 급해서, 얼른 베이스를 잘 치고 싶었다. 별로 어렵지도 않은 악보를 손가락 아프다고 제때 연습 못하게 되는 게 너무 억울했다. 그래서 물집이 생기면 생긴 대로 계속 치고, 물집이 터지면 터지는 대로 계속 쳤다. 따가우면 그냥 찬물로 소독(?)을 하고 와서 다시 쳤다. 그러다 보면 짚는 손가락 말고 튕기는 손가락이 미끄러워졌다. 피였다.
말 그대로 '피가 날 정도로' 연습했다. 찬물로 손가락을 씻고, 물티슈로 줄을 닦고 다시 쳤다. 이 짓을 피가 안 날 때까지 반복했다. 써놓고 보니 참 무모한 짓이다. 결국 무대를 무사히 마무리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혼자 유튜브를 보며 연습했는데, 나름 새터 무대에도 오를 만큼 실력이 아주 나쁘진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부끄러운 실력이지만.
왼쪽 손가락에서도 피가 났었나?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때 연습하던 곡들은 왼손보단 오른손이 힘든 곡들, 즉 단순한데 빠른 곡들이라 오른쪽에서만 피가 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 이후로 지금까지 오른쪽 검지와 중지에는 다시는 굳은살이 생기지 않는다. 물집이 생기고, 터지고, 피가 나고, 아물고, 굳은살이 되고, 그 굳은살은 어느새 사라졌다. 두 손가락은 다른 손가락들처럼 그저 부드럽다. 하지만 물집조차 생기지 않을 만큼 강하기도 하다.
언제나 나에게 물집은 굳은살을 위한 기회다. 물집이 생기면, 아 이제 이걸 굳은살로 만들어서 다시 아프지 않게 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한다. 발에 물집이 생기면 더 열심히 걷고 더 열심히 뛴다. 손가락에 물집이 생기면 베이스를 더 자주 친다.
내가 어설퍼서 생긴 바로 그 물집이 나중에는 숙련의 상징인 굳은살로 변한다는 게 좋다. 그리고 그 굳은살이 나중에는 티도 안 나지만 가장 강한 살이 된다는 게 좋다. 살에 물집이 잡히고, 물집이 굳은살이 되고, 굳은살이 다시 티 안 나게 강한 살이 되어가는 이 과정이 참 매력적이지 않나. 특별히 튀지 않는 자연스러움 안에 실은 가장 피 나는 노력과 거기서 얻은 강함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