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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Jul 10. 2019

나를 꺼내 놓는 일

    하루에 한 편씩 글을 쓰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다. 겨우 4일째에 이런 생각이라니. 원래 거의 매일 글을 쓰기는 했지만, 보통은 나의 이야기가 들어가 있더라도 사회 문제나 어떤 현상에 대한 분석이 핵심이었다. 그러나 지금 쓰는 글은 내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으려고 노력한다. 분석하는 글만 쓰고 읽는 일은 나를 오만해지게 한다. 내가 어떠한 문제를 진정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오해를 바탕으로 우쭐해지고, 결국 내가 분석한 대상보다 나를 더 앞에 내세우게 된다.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개인적인 글은 어렵다. 그런 글은 기본적으로 부끄럽고 거짓말이 되기 일쑤다. 나는 언제나 나를 포장한다. 마치 마트료시카처럼 나는 나보다 큰, 그보다 큰, 그보다도 큰 나를 뒤집어쓰고 있다. 글은 거짓말에 특화된 매체다. ‘마트료시카’가 기억나지 않아 ‘러시아 인형’이라고 검색한 뒤, 마치 원래 저 단어를 알던 것처럼 써도 아무도 모르니까. 물론 글만 그런 건 아니다. 준비할 수 있는 대부분의 매체가 그렇다. 그래서 굳이 이를 거짓말이라 생각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준비가 곧 거짓말일 수는 없는 거니까.      


    어젯밤에는 집에 가면서 내내 어떤 글을 쓸지 고민했다. 요즘 고민하는 주제가 있고, 이를 친구와도 나누고 부모님과도 나누었지만 사실 의문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그런 걸 글로 쓸 수는 없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질문을 던지는 일은 학창시절 내내, 그리고 대학교에서도 사실상 금지되어 있었다. 질문은 다른 학생들의 시간을 빼앗고 진도를 방해한다는, 특히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한 질문은 오래 걸리기 때문에 더욱 민폐라는, 생각할수록 황당한 이야기. 그러나 그게 나의 현실이었다. 나는 정말 모르는 걸 질문해 본 적이 거의 없다. 나는 적어도 95만큼 알고 5만큼이 헷갈릴 때만, 혹은 100만큼 알면서 내가 100만큼 알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고 할 때만 질문을 던졌다. 이때만 나는 편하게 질문할 수 있었다.     


    글도 마찬가지다. 요구받는 글은 대부분 분석하고, 정리하고, 주장하는 글이다. 그 안에 내 이야기가 어느 정도는 포함되어 있더라도, 나의 이야기는 결코 중심을 허락받지 못한다. 내가 쓰는 글에서 내가 중심에 없다는 건 얼마나 슬픈 일인가. 학교에서 과제 때문에 레포트를 쓰든, 어디에 기고를 하든, 원고 청탁을 받든 거기에 내 이야기는 별로 없다. 내 이야기를 가장 많이 쓰는 공간은 블로그칼럼이었다. 블로그는 일기장이나 다름 없으니 그렇다 치고, 칼럼은 질병과 통증, 아픔을 담는 곳이라서 내 이야기라고 느꼈다. 그러나 이때도 나는 요구받은 글을 썼다. 블로그는 SNS 정치 활동의 연장선이었고, 거기서도 아픈 이야기를 빼면 나의 이야기라 할 법한 글은 사실상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루에 한 편씩 글을 쓰려고 하니까 계속 나와 일상과 하루를 돌아보게 된다. 나의 이야기가 아니고서는 이렇게 자주 글을 쓸 수가 없다. '지극히 사적인'이라는 매거진 이름은 그렇게 '닉값'을 하게 된다. 최근에 출판 시장에 에세이가 너무 많은 현실에 자주 혀를 차곤 했다. 작가들의 문제가 아니라, 번역서를 내기 어려운 출판 업계 사정과 학술 서적을 내기 어려운 대학 교원 평가 제도가 문제라는 건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에 '감성글귀'로 올라올 법한 글들이 '에세이'와 '책'이라는 이름으로 양산되는 장면은 꽤나 절망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는 에세이 자체에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그렇지 않은 글들도 많지만, 에세이를 쓰려면 최소한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고 이를 글로 객관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에세이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데에서는 벗어났다. 에세이를 쓰려면 적어도 외투는 벗어야 한다. 그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대로 어딘가 묻혀 버렸을 별 일 없는 일상을 끄집어 글자로 바꾸려면 내 하루와 내 몸을 돌아봐야 하고, 그러려면 황당하고 당혹스러운 나들을 마주치게 된다. 이해하기 힘든 나를 마주치게 되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나도 마주치게 된다. 


    그래서 일상 에세이를 쓰는 시간은 종종 어색하고 불편하다. 남에게 보여 줄 요량으로 일기를 쓰는 것 같아서, 때로는 초등학교 때 억지로 쓰던 일기를 반복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재밌다. 더 많은 나를 보게 되는 것 같고, 평소에 뒤집어쓰고 사는 조잡한 포장지를 조금 걷어내고 포장지를 얇게, 담백하게 만드는 과정인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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