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비가 온 날이라서
아침 일찍 병원에서 피 검사를 하고 진료를 받았다. 나는 희귀 질환자에게 의료비를 지원해 주는 산정특례라는 제도로 의료비의 90%를 지원받고 있는데, 유효기간이 3일 남아서 이를 연장해야 했다. 진료는 대체로 별 이야기 없이 끝난다.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식단 관리에 좀 더 신경 쓰세요, 운동하세요, 사실 진료라고 보기는 어렵다. 진료보다는 조언이나 격려에 가깝지. 오늘은 피 검사 때 평소보다 조금 힘들었는데, 간호사님이 핏줄 위치를 약간 이상하게 고른 탓이었다. 그 사이에 살이 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한데, 핏줄이 잘 안 보여서 겨우 고른 자리는 압력이 매우 낮은 것 같았다. 보통은 바늘을 꼽고 채혈을 시작하면 피가 솟구치듯 나오는데, 오늘은 찔끔거리며 나오느라 시간도 오래 걸렸다.
주기적으로 피 검사를 받는 사람은 팔이 접히는 부분의 피부 두께를 생각하게 된다. 그 피부 두께는 잠깐이긴 하지만 상당히 짜증나는 통증을 유발할 수도, 없애 줄 수도 있으니까. 다음 진료를 받기까지의 세 달 동안 식단 조절을 조금씩 하면 채혈할 때 조금은 수월해질까? 이처럼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는 것만으로도 나는 내 몸을 더 일상적으로, 더 자세히 신경 쓰게 되었다. 식단, 체력, 배변, 수면, 이런 것들을 그렇게 신경 쓰게 되면 자연스럽게 걷기, 수면, 앉기, 일어나기, 이 모든 하나하나의 움직임들을 의식하게 된다. 그런 걸 의식할수록 나는 내 몸이 나에게는 너무나 어렵고, 내 통제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통제 바깥에 있다는 그 감각은 언제고 통증이 다시 나를 찾아올지 모른다는 불안과 연결된다. 요즘은 증상이 거의 없어서 굉장히 편하게 지내고 있지만, 가끔 난데없이 어느 관절이 아프거나 화장실에서 휴지에 피가 묻어나오기도 한다. 요즘은 정말 가끔 있는 일이다. 그러나 오래 지속된 이런 상태는 나에게 조금 이상한 흔적을 남겼다. 끝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감각, 아니 그보다는 무엇도 절대 끝나지 않는다는 감각. 이 둘은 조금 달라. 끝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건 모든 게 끊임없이 나를 에워싸고 압박하는 느낌이라면, 무엇도 절대 끝나지 않는다는 감각은 그보다 잔잔하게 만성적으로 나의 배경을 덮고 있는 느낌이다.
일단 시작되면 그것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것, 이는 그저 끝없이 모든 게 나를 에워싸는 상황보다 조금 더 심한 압박과 좌절을 선사했다. 나는 시작을 두려워하게 됐다. 시작하면 끝나지 않고 나를 괴롭힐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지치지 않고 나를 괴롭힐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하고 있던 일들을 멈출 수는 없다. 끝나지 않는 책임과 피로 속에서 나는 말라 비틀어져 간다.
이런 고통의 감각까지 안 가더라도, 나는 일상을 자꾸만 이상하게 바라본다. 비가 그치고 해가 지는 당연한 자연의 사건들이 너무 어색해지고 믿기지가 않는다. 비가 온 날에는 비가 그친 후에도 비가 그쳤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세차게 내리던 비가, 바로 조금 전까지도 내 우산을 때리던 비가 어떻게 갑자기 멈출 수 있는 걸까, 비는 정말 멈췄을까, 공기에서 그저 작은 비로 약해지기만 한 건 아닐까, 나는 비가 그쳤다는 사실이 자꾸만 안 믿겨서 빛 바로 근처나 어두운 허공을 바라본다. 그곳에 빗줄기가 안 보일 때의 어색함과 거리감이란, 대체 그 빗방울들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어떻게 그렇게 사라질 수 있는 걸까.
해도 그렇다. 온 세상을 밝히던 해는 어느 순간 사라진다. 달을 통해 거리를 비추지만, 나는 낮에서 밤이 되는 순간이 비가 그치는 순간처럼 어색하다. 비가 그치는 순간, 빛이 그치는 순간. 바람도 그렇다. 바람이 나를 한번 강렬하게 휩쓸고 지나가면 그 투명한 직물의 감촉은 내 피부에 계속 아른거린다. 그래, 감각이 아른거린다. 모든 감각이 아른거린다. 끝나지 않고 그저 아른거린다. 이런 감각은 나의 일상에 깊이 깔려 있다. 그저 아른거린다, 그저 아른거린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 그저 아른거린다. 어떤 일이든, 어떤 통증이든, 어떤 피로든, 그저 아른거린다. 더 심해지지는 않을 수도 있어, 그러나 끝나지는 않아, 결코, 끝나지는 않아.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 기형도, "안개"
눈앞이 뿌얘진다. 정지한 바람 사이를 가로지르며 바람 덩어리들이 나에게 닿고, 어둠이 빛의 잔상처럼 느껴지는 만성적인 감각은 정지한 수분 덩어리가 뭉쳐서 만들어진 안개 속을 걷는 것만 같다. 나는 축축하게 자욱한 안개 속에서 숨도 쉬지 않고 "쓸쓸한 가축들처럼" 막막하게 걷는다. 숨이 차오르면 이미 실패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안개 속을 걷는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