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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Oct 04. 2020

나름의 청춘

술, 친구, 막차, 밤샘에 관하여  

'청춘'이나 '청년'이라는 말을 싫어하면서도, 그런 느낌을 주는 나의 기억들을 괜히 파내어 들여다보고 싶어지는 날들이 있다. 참 '청춘스럽다'는 느낌이 드는 아주 드문 날에.


술.


쪼금 과장하자면, 고등학교 때 삶의 낙은 배드민턴과 맥주였다. 여름에 운동을 끝내고 집에 오면, 특히 낮에 돌아오면 집에 부모님이 안 계시곤 했다. 나는 냉장실에서 맥주 피처를 하나 꺼내어 냉동실로 옮겨 두고 샤워를 한다. 샤워가 끝나서 나오면 얼음이 안 어는 정도에서 아주 시원하게 준비된 맥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고 운동한 후 뜨거운 물로 샤워한 뒤의 그 맥주 맛은 이루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종종 우리 반에서는 급식을 먹기 싫다고 점심에 옆 학교로 담을 넘어서 큰 도로로 나가곤 했다. 3교시와 4교시 사이의 쉬는 시간에 덩치고 크고 착한, 분위기와 사람을 이끌던 친구들이 "다뤠?!"라고 외치면 거기에 동참할 친구들이 "다뤠!!"라고 화답하곤 했다. 큰 도로변에 있는 '다래식당'에 가자는 암호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정문은 아주 긴 막대기를 들고 있어서 '창지기'라고 불리던 선생님이 지키고 있으니, 옆 학교를 통해야 했다.


일제강점기에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로 지어진 학교는 시간이 지나며 중학교 하나와 고등학교 두 개로 나뉘었고, 그 사이에는 담이 세워졌다. 하지만 두 고등학교 사이의 담은 그리 높지 않아서, 당시 키가 160 정도였던 내가 넘기에도 전혀 무리가 없었다. 우린 담을 넘어서 운동장을 가로지르다가, 다른 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붙잡으러 뛰어나오는 경비노동자분을 따돌리고 와다다 뛰어내려가곤 했다.


"다뤠" 말고도 고3 때 우리 반에서만 통하던 은어 하나가 있었다. "칠종" 7시에 종각에서 모이라는 뜻이다. 나는 거의 항상 평일의 그 시간에 야자를 했는데,  한 번인가 두 번은 '칠종'에 동참했다. 종각 앞에서 친구들과 모이면 당시 거의 우리 모임의 '큰 형' 같은 역할을 하던 친구가 우리를 술집으로 안내했다. '아직 마시면 안 되는' '술'을 마신다는 것이 즐거운 날들이었다. 2학년 때 난데없이 술이 세다고 소문이 퍼진 나는 거기서 안 취한 척을 하느라 고생이었는데, 특히 화장실에 자주 가는 건 술이 약하다는 증거라고 여겨졌기에 나는 화장실도 좀 참느라 고생이었다. 당시에도 즐거웠지만, 시간이 지나서 떠올리니 더 재밌는 기억이다.


그리고 스무살, 크론병 진단과 함께 술은 내 인생에서 사라진 줄 알았다. 술자리를 피하면서도 맥주 생각은 종종 났다. 특히 2015년 4월에 대자보를 썼던 문제가 해결되던 날, 나는 과제를 덮어두고 도서관에서 나와 잔디밭에 앉았다. 손에 맥주 하나가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었을 테지만 내가 마신 건 사이다였다. 아마 그날이 대학 입학 후 술이 없어서 가장 아쉬웠던 날이 아니었을까.


친구.


대학에서 술은 사람을 만나는 가장 주된 수단이다. 술 자체를 안 좋아해도 사람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좋다며 술을 마시는 이들도 많았다. 학과/동아리/학생회 뒤풀이는 기본이 물이 아니라 술이었다. 뒤풀이는 주로 술집에서 진행되었고, 가면 이미 술이 테이블에 가득 깔려 있었다. 나는 그런 자리에 나간 적이 거의 없다.


술을 거의 안 마시다 보니 내가 사람들과 만날 때는 주로 식사 후에 카페로 이동하는 게 패턴이었다. 술은 안 마셔도 이야기하는 건 워낙 좋아하다 보니 카페에서 몇 시간이고 떠들곤 했는데, "남자끼리 그런 데 가는 거 아니다"라는 이상한 남성 동성사회의 문화 때문에 그런 코스로 사람을 만나던 나에게 남은 친구는 대체로 남자가 아니거나, 남자들과 무리로 어울리지 않는 남자들이었다.


얼마 전, 한국다양성연구소에서 남성 그룹 안의 다양성을 이야기해 보는 자리에 초대받아 촬영을 진행했다. 방역 수칙이 훌륭하게 지켜지는 환경에서 어딘가 엇나간 '남성' 다섯이 대화를 나누었는데, 내 옆에 앉은 분은 유아교육과에서 공부하며 유치원에서 일하는 분이었다. 그분의 경험도 나와 비슷했다. 나는 질병 때문에, 그분은 성격과 취향 때문에 남성들과 함께 식사하고 놀기 어려웠다. '남자끼리 무슨 파스타' '남자끼리 무슨 케잌' 같은 말들 때문에 나는 '그나마' 함께 즐길 수 있는 음식도 못 즐기게 되기 일쑤였다.


카페에 단체로 가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나의 친구 관계는 상당히 좁다. 적지 않은 경우에 아주 친한 친구가 있으면 그의 아주 친한 친구들을 몇 번은 보기 마련인데, 나는 그런 일이 거의 없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자리에 잘 나가지 않고, 나가더라도 내 친구와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인사를 건네질 않는다(이건 성격의 문제가 좀 있다). 아무나와 쉽게 빠르게 말을 트는 술자리와는 달리 카페의 분위기는 좀 달라서, 원래 친한 사람이거나 앉아서 잠깐 일 얘기를 하다 나오는 적이 많다. 먹고 마시는 문제에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과 인간관계의 범위가 의존하는 것이다.


막차와 밤샘


대학에 와서 막차를 놓친 날은 별로 없다. 그럴 일이 없었으니까. 1학년 때는 기숙사에 살아서 그랬다고 쳐도, 어차피 그 이후로도 차를 마시다가 막차를 놓칠 일은 별로 없다. 대화가 정말 좋으면 막차 시간이 아쉽기도 하지만, 그래도 굳이 시간을 넘겨 대화를 이어가지는 않는다. 직접 차를 몰지 않는 사람으로서 막차를 놓치면 택시를 타야 하는데, 학생이라 택시 값이 부담되니까. 이런 걸 극복하려면 다소 정신줄을 놓아야 하는데, 그때 필요한 게 술이다. 평소 안 할 법한 행동을 하게 해 주니까.


그러다 보니 밤을 샐 일도 거의 없다. 과제나 시험공부를 하더라도 나는 밤샘이 무리다. 누구에게나 무리겠지만, 하룻밤을 새면 적어도 일주일은 회복에 써야 하는 나로서 놀다 새든 공부하다 새든 밤샘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친구들과 놀 때 가끔, 특히 PC방의 힘을 빌리면 밤샘이 가능하기도 했다. 물론 그러고 돌아오면 쓰러지지만, 밤샘은 대체로 즐거운 기억이다. 더 놀고 싶어서 더 노는 거니까.


밤을 새면서 극심하게 밀려오는 피로를 꾹 누르다 보면, 술을 마신 친구들과 비슷한 상태가 된다. 아무 말이나 던지고 헛짓을 하고 실없이 웃는다. 움직임이 커지고 목소리가 커지며, 기분이 아주 좋아진다. 누가 말을 해도 잘 알아듣지 못하고 대충 대답하는데, 너무 티가 나서 앞 사람과 서로 웃는다. 하도 실없이 웃는 게 기본이 되니 귀엽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다(그럼, 기왕 피곤할 거면 귀여운 게 낫지).  


한 친구.


친구를 만났다. 생일선물을 주겠다며 동네까지 찾아온 고마운 친구. 면역억제제를 먹느라 멀리 움직이기 어려운 나를 만나려면 서울 종로구의 구석에 있는 이 동네까지 찾아와야 한다. 동네는 넓은데 상가는 별로 없고, 아파트도 거의 없어서 사람도 별로 없고, 대신 지나다니는 차만 많아서 갈 곳은 없는데 딱히 앉아서 쉴 곳도 없는 이상한 동네, 하지만 건물들이 낮아서 괜히 기분이 좋은 편안한 동네.


애매한 시간에 만나서 애매하게 걷다가 5시가 조금 안 되어 식당에 들어갔다. 피자와 리조또. 뭐든 좋아한다는 친구에게 나는 피자 중 '마약옥수수'를 권했는데, 이 메뉴를 먹고 별로라고 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예상 적중, 성공이었다. 다행히 식당이 넓은 편이라 테이블 사이 거리가 꽤 되어 거리두기가 가능했고, 나는 나름대로 마음 편히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식사 후에는 카페와 술집 중에 골라야 했는데, 술을 워낙 좋아하는 친구라 술집으로 가게 되었다. 아주 예전에 가족끼리 친한 친구네와 함께 가고, 동네 친구가 군대에 갈 때 한 번 다녀온 술집. 사람이 많지 않고, 테이블 사이 거리가 좀 있었다. 여기도 괜찮은 선택. 맑은 국물 하나를 시키고, 사케 한 도쿠리를 주문했다. 한두 병쯤 마시면 헤어지겠지.


그런데 그날따라 술이 너무 잘 넘어갔다. 친구도 나도 정신은 멀쩡한 채로 술을 계속 마셨고, 처음을 빼고는 계속 따뜻하게 술을 데워 달라고 했다(사케는 누가 뭐라 해도 따뜻한 게 최고다). 도무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막걸리, 청주, 사케는 취할 만큼 마셔도 아프지 않다. 오히려 다음 날에 속이 편해지기까지 한다. 그래서 아주 마음 편히 사케를 마셨다. 살짝 추워지는 날씨에 따뜻한 사케와 맑은 국물은 저녁 식사 직후에도 거침없이 몸을 데웠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알고 지냈으니 벌써 만 5년이 넘었다. 그 사이에 자주 만나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우린 공유하는 게 많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대화는 잊고 지내던 수많은 기억을 상기하는 훌륭한 장치가 되곤 한다.


그와 내가 처음 만난 건 메이데이 집회였고, 그때 우리는 함께 서서 최루액 섞인 물을 쏘아대던 경찰들과 대치했다. 내가 보조배터리를 빌려줬다가 일찍 받지 못한 건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고맙게도 가끔 연락이 먼저 와서 받았지만.


나는 그 이후 몇 년 동안, 지금까지 장애인권 활동에 열중하고 있다. 최근에는 코로나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진 못하지만, 공부만큼은 멈추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는 정치 공부를 하면서도 아주 현실적인 문제를 함께 고민했고, 그러다 보니 기자처럼 현장의 일들을 해 본 적도 있다. 그렇게 서로 바쁜 시간을 보내다가, 우리는 뜬금없이 교지 편집위원회에서 만났다.


사람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들어온 지 3개월쯤 된 나에게 부편집장이라는 이름이 주어진 때에 그가 수습 편집위원으로 합류했다. 그렇게 다시 만난 것도 재밌었는데, 돌이켜보니 그때 함께 만든 교지의 정리회의가 내가 대학 와서 가장 술을 많이 마신 세 날의 시작이 되어 있다. 공교롭게도 그 세 번에는 모두 이 친구가 함께 있었고. 정리회의 때 나는 막걸리를 마셨고, 일이 끝났다는 게 즐거워서 꽤 큰 소리를 내며 술을 빠르게 마셨다. 다들 집에 가야 하니 오래 마시지는 못했지만, 술을 남길 수는 없지. 그게 첫 번째였다.


그 다음은 얼마 전, 코로나19가 잠시 가라앉았을 때였다. 그는 한 번의 작업을 함께한 후 활동을 멈췄고, 나는 그 후로도 두 번 더 교지 편집에 참여했다. 하지만 올해에는 둘 다 이미 은퇴(!)한 신분이었다. 그런데 현직과 전직 편집위원이 모두 참가하는 세미나가 열리니 참가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고, 그와 나는 거기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따로 연락해서 만나지 않았으니 거의 1년 만의 만남이었다.


그날은 사람들이 좋아서 즐겁기도 했고, 누군가와 함께 글을 쓰던 날들이 떠올라서 즐겁기도 했는데, 내가 쓴 책이 나온 날이라서 더욱 기뻤다. 기분이 좋을 일만 가득했던 그날, 나는 아주 빠르게, 많이 마셨다. 지평 생막걸리와 장수 막걸리를 번갈아가며 마시고, 나중에는 청하까지 마셨다. 뱃속에는 세 종류의 술이 섞였고, 나는 새벽 4시인지 5시까지 마시다가 결국 엎어져 잤다. 그 친구는 그때까지도 멀쩡히 깨서 다른 사람들과 정리까지 마치고 나갔다.


몇 없는 청춘의 밤.


그리고 이번이었다. 나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내가 가장 많은 술을 마신 날들에 모두 이 친구가 있더라. 좀 신기하기도 했고, 몇 번 만나지도 않는데 많이 마신 술자리에는 얘가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웃기기도 했다. 친구는 나에게 인생을 헛살았다며, 이렇게 술을 마셔야 '불금'이라고 말했다. '불금', 대학 입학 후 가장 큰 거리감을 느낀 단어 중 하나였는데 이렇게 맘 편히 술을 마시며 '불금'을 보내기도 하는구나. 그런 날이 전에도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게 '불금'이라고 언어화된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처음에는 한두 병쯤 마시고 헤어지겠지 하던 우리는 작은 병으로 사케를 주문했는데, 술이 너무 잘 넘어가다 보니 술을 계속 시켰다. 결국 다섯 병쯤 시켰을까, 직원분이 '이러실 거면 큰 걸 주문하시는 게 더 싸다'고 알려주실 정도로 우리는 직원을 자주 불렀다. 그런데 그렇게 술을 마시다가 시간을 봤더니 8시, 어라. 만나길 4시에 만나니 저녁 먹고 술을 마셔도 시간이 늦지 않았다. 나야 집이 5분 거리지만 친구는 강을 건너야 해서 걱정이었는데, 막차를 놓칠 일은 없겠구나.


그런데 바로 그 여유가 문제였다. 시간 여유가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둘 다 술을 더 시키고, 더 떠들고, 옛날 이야기에 빠지고, 요즘의 고민과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술 기운이 오르니 말도 더 편하게 나왔고, 아주 시끄럽지는 않았지만 술집의 분위기도 한몫했다. 따뜻한 술과 좋은 친구, 즐거운 술자리. 그러다가 문득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어 있었는데, 이 동네는 막차가 일찍 끊기는 편이다. 당장 나가면 무사히 친구를 집에 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미 막차는 끊겨 있었고, 남은 걸 타더라도 환승이 가능할지 알 수 없었다. 택시를 태워 보내야 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친구가 집에 안 가겠다며 난리를 치는 것이다. 길도 모르면서 어딘가로 뛰어가는 친구 때문에 당황한 나는 우선 그를 붙잡아 놓고 택시를 타러 가자고 설득했는데, 설득이 쉬이 먹히지 않는 상황이었다. 무려 40분 정도를 사람 거의 없는 주택가의 거리에서 실랑이를 벌이며, 나는 "OO아 집에 가자.. 제발... 부탁이야.. 택시비 내 줄 테니까 집에 가.."를 반복했고 친구는 나를 (고작 5분 거리인) 집에 데려다 주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손목을 붙잡고 있다가 물리력을 동원하지 말라는 친구의 말에 알겠다고 손으로 바꿔 잡은 후 똑같이 택시를 태우러 가려는데 소용은 없었다. 나보다 훨씬 술을 잘 마시는 친구라서 이런 일은 전혀 예상도 못했다. 애초에 사케를 다섯 병이나 주문할 것도 예상 못 했고, 오랜만에 만났다고 하더라도 8시간 넘게 놀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런데 술자리가 끝나고 생긴 일이 가장 예상 밖이었다. 세상에, 얘가 취하다니. 덕분에 내 술이 다 깼다.


그렇게 거리에서 "뭔진 모르겠지만 내가 잘못했으니 집에 가줘 제발"이라는 말을 반복하던 내가 지쳐 쓰러지기 직전에 아버지가 집 아래로 결국 내려왔고, 그제야 친구는 얌전해져서 곧 택시를 잡아 집으로 갔다. 다음 날에 친구는 내게 혹시 화가 났냐고 물었는데, 화가 나지 않았다는 대답은 진심이었다. 솔직히 재밌긴 했다. 사실상 평생 해 볼 일이 없는 경험이라고 생각했으니.


재수가 끝나고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학원 친구들과 스키장에 놀러간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술을 한 잔도 안 마셔서 친구들이 술을 마시고 노는 동안 옆에서 설거지를 하고 엎질러진 온갖 것을 정리했다(엎질러진 것 중엔 사람도 있었다). 사실 나는 그날에 소외감을 느끼기보다는 내가 술자리에 기여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찾은 느낌이었고, 굉장히 즐거웠다. 아마 평생 그런 날이 별로 없으리라 생각했으니까.


비슷했다. 즐겁고 좋았다. 스무살과 스물한살 사이의 스키장, 그리고 스물여섯의 환절기. 술자리의 모습은 많이 달랐고, 아마 이번과 같은 경험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스무살에 겪는 일일 테지만, 스물여섯의 '불금'도 재밌었다. 코로나 때문에 많은 일상이 멈춘 시기에 난데없이 찾아온 '청춘스러운' 밤이었다.


* 함께 술을 마신 친구에게 먼저 보여주고 동의를 구한 후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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