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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소녀 Jan 27. 2023

마지막 선물

수필


  나는 주머니 속에 든 지폐를 만지작거리며 옷 매장부터 돌았다. 진열된 아동복은 몇 벌 없는 데다 예쁘다 싶은 옷은 만원이 넘는 금액이 붙여 있었다. 장마당을 한 바퀴 돌았을 땐 해가 서쪽 봉우리 위에 걸려 있을 정도로 기울어 있었다. 가로등도 전등도 없는 장마당은 해가 지면 짐을 싸는 장사꾼들과, 짐을 들어주러 마중 나온 가족들, 뒤늦게 장보러 온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됐다. 그 틈으로 꽃제비들은 물속을 가르는 오리처럼 인파를 가르며 도둑질할 틈을 노렸기 때문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나는 마음이 급해져 빠르게 아동복 쪽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새 쌀, 도자기, 어른 옷 매장은 비기 시작했다. 반찬 매대 쪽만 펼쳐 놓은 대로 두부 밥, 인조고기볶음, 까나리볶음 등이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상대적으로 부피도 무게도 적은 양말 매장은 그때까지 펼쳐져 있었다. 다시 양말매장으로 찾아온 나를 보고 장사꾼아줌마가 이만한 게 없다며 빨간 꽃무늬가 촌스럽게 찍힌 양말을 내 앞으로 밀어 놨다. 아줌마가 보기에 학생인 내게 돈이 없어 보였는지 비슷한 양말들만 찾아 보여줬다. 나는 우물쭈물 미리 봐뒀던 양말을 만지작거리며 마음에 들지 않는 저렴한 양말을 사고 생활비를 남길 것인지, 용돈을 다 털어 마음에 드는 좋은 양말을 살지 고민했다.  

  아주머니가 슬슬 끝에 진열한 어른 남자 양말부터 보자기에 싸기 시작했다. 옆에 앉은 아줌마는 먼저 간다며 마중 나온 남편 자전거에 짐을 실었다. 나는 쫓기듯 촌스러운 빨간 무늬양말을 밀어내고 흰 양말을 손에 쥐었다. 주머니에 있던 돈을 꺼내 값을 치르고 나니 잔돈만 남았다. 나는 발목 끝부분을 하늘색 꽃잎 모양으로 두른 하얗고 두꺼운 양말을 손에 쥐고 장마당을 나섰다. 그동안 틈틈이 그물을 손질해 주고 번 돈으로 동생 선물을 샀다는 것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둠이 깔리는 장마당 골목골목엔 집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늘어서 있었다.


  어느새  굴뚝마다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양말을 들고 들뜬 걸음으로 동생을 만나러 외할머니 집으로 갔다. 나는 며칠 뒤면 브로커와 길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동생과 하룻밤 보내려는 생각으로 늦은 시간에 찾아갔다. 둘째 이모가 밥상을 차려주며 오늘은 늦었으니 자고 가라 했다. 자고 가라는 말에 기분 좋게 차려주는 밥을 먹었다.

  외할머니가 나를 자세히 보더니 집은 어쩌고 왔는지 물었다. 평소 외출 할 때처럼 출입문에 열쇠를 잠그고 대문은 안에서 잠그고 뛰어넘어왔다 말했다. 외할머니가 가마솥은 빼놓고 왔는지 물었다. 나는 구멍이 난 알리미늄 가마솥인지, 아주 쪼그마한 쇠가마를 말하는지, 개 뜨물을 끓이는 큰 가마솥을 말하는지 몰라 어리벙벙했다. 내가 보기엔 우리 집에 있는 가마솥은 도둑이 와도 가져갈 만큼 좋은 게 아니었기 때문에 숨겨 놓을 가치가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빨래 줄처럼 긴 외할머니 잔소리가 시작됐다. 아카시아 가시로 콕콕 찌르는 것 같은 말을 한참을 듣고 나니 몸에 가시가 돋는 것 같았다. 나는 미련하게 일어나지도 못하고 쏟아내는 말들을 다 받아내곤 눈물을 떨겄다.

  삼십 분쯤 됐을까 온몸에 마비 온 것 같았다. 눈치 보던 둘째 이모가 더 늦기 전에 얼른 바닷가 집에 내려가라 했다. 나는 부푼 마음으로 샀던 동생 양말을 벽보 밑에 밀어놓고 일어났다. 그리고 도망치듯 빠져나와 가로등도 없는 시골길을 두 시간이나 걸었다. 사방에 눈이 쌓인 덕에 반쪽 자리 달빛과 별빛만으로도 앞이 어느 정도 보였다. 그날 나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외할머니 집에 다시는 가지 않겠다 맹세했다.

  그 뒤로 정말 외할머니 집에 가지 않았다. 언제쯤 다시 외할머니 집에 갈 수 있는지 묻지만 서울 하늘은 별이 잘 보이지 않아서인지 침묵뿐이다.


  카카오톡에 아는 동생 생일이 뜬다. 뭘 보낼지 고민하다 치킨쿠폰을 보냈다. 문득 생각해 보니 그동안 주고받은 선물이 세지 못 할 만큼 많다.

  선물을 떠올리면 벽보 밑에 숨겨 든 초라한 양말이 떠오른다. 지금이라면 동생에게 더 좋은 선물을 해 줄 수 있을 텐데.... 말만 하면 뭐든 다 해 줄 텐데. 나는 언제쯤 동생 생일 선물을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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