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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모범적인 어린이여, 너는 커서 미친개가 된다

바야흐로 여름이었지

by 다운
결국 모든 인간은 상습범이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 상습적으로 전철을 타고, 상습적으로 일을 하고, 상습적으로 밥을 먹고, 상습적으로 돈을 벌고, 상습적으로 놀고, 상습적으로 남을 괴롭히고, 상습적으로 착각을 하고, 상습적으로 사람을 만나고, 상습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상습적으로 회의를 열고, 상습적인 교육을 받고, 상습적으로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이 아프고, 상습적으로 외롭고, 상습적으로 섹스를 하고, 상습적으로 잠을 잔다. 그리고 상습적으로, 죽는다. 승일아, 온몸으로 밀어, 온몸으로! 나는 다시 사람들을 밀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상습적으로.
– 박민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중



대학교 1학년, 그야말로 한창이라고 할 수 있는 그때 내가 입에 달고 다니던 레퍼토리가 있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다. 정확한 내용은 나도 잘 모른다(문송합니다). 다만 내가 그것을 곧잘 인용한 이유는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지금 나의 행태는 일종의 반작용이라고. 나의 작용은 무지무지 강력한 것이었기 때문에, 지금 나는 그만큼 강력한 반작용을 겪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모든 것을 정당화했다. 과 행사에 빼놓지 않고 참석하여 술을 왕창 마셔대는 것. 종종(혹은 자주) 막차가 끊긴 새벽에 술에 취해 헤롱거리며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것. 숙취가 심한 날은 그날의 모든 강의를 자체 휴강(=무단 결석)해 버리는 것. 나도 알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몰라도 됐을 사실이지만 학칙에는 총 수업 일수 중 ⅓(¼일 수도 있음) 이상을 결석하면 그 과목은 자동으로 F로 처리된다는 조항이 있다. 1학년 1학기 때 알게 된 사실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이후로는 해당 조항을 적용받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탈은 한계가 있었다. 그저 F 학점을 받은 (교양)과목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오랫동안 동기들의 놀림거리가 되어야 했을 뿐이다.

전공 과목을 듣기 시작한 2학년 1학기부터는 대세에 따라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놀았다. 열심히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내 전공인 통계학의 과목들은, 특히 전공 입문 단계의 과목들은 거의 매주 과제가 나온다. 한 학기에 듣는 과목은 총 6개. 그중에 과제가 없는 교양도 2-3개 있었지만 나머지는 전공 과목이었다. 과제를 하지 않는다는 건 내 사전에는 존재한 적이 없는 일이었고 적어도 2-3개의 과제가 있는 상태가 그 당시 나의 디폴트(기본값)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공부라는 본분을 다하는 대학생의 모습을 갖춰 갔다. 그러면서도 술은 오지게 먹었다.


2학년이 된 나는 과 학생회 소속이 되어 모든 과 행사에 참석하여 행사를 함께 이끌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본디 과 행사란 어떤 이름과 명분을 가졌든 종국에는 부어라 마셔라 하는 술자리로 귀결되는 것이다. 학생회가 되고 나서는 내가 앉은 테이블의 분위기를 띄우고 이끌어가며 어색해하는 후배 혹은 동기들의 화합(사실상 취기)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의무까지 더해졌다. 의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난 원래 그런 애였기 때문에 새로운 미션을 받은 건 아니었다. 새내기일 때도 가장 큰 목소리로 술 게임을 하며 뭇 선배와 동기들의 이목을 끄는 관종이었으니까. 술은 마시면 는다고 했던가, 나름 술자리에서 오래 살아남는 노하우까지 터득하여 학생회의 일원으로서 고주망태가 된 후배 또는 동기들을 케어하는 것도 나의 몫이었다.


예를 들면 술자리가 마무리될 즈음에는 술에 대한 요령이라곤 없는 후배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시체가 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때 학생회와 살아남은 일부가 나서서 그들을 한 명씩 메고 인근 노래방에 간다. 가는 길에 희미하게라도 정신이 드는 사람이 생기면 택시에 고이 태워 보낸다. 코인 노래방이 없는 시절이었으므로 일반적인 룸 크기라면 방마다 4-5명씩 뉘어놓을 수 있다. 그렇게 시체들을 노래방에 진열해 놓고 빠진 사람이나 잃어버린 물건 등이 없는지 확인한 뒤 한숨 돌리고 쉬다 보면 날이 밝아 오고 두 시간 남짓한 노래방의 시간도 끝난다. 그럼 용사를 깨우는 정령이 된 느낌으로 장렬히 전사한 이들을 하나씩 조심스레 깨운 다음에 지하철역으로 데려가 첫 차를 태워 보내고 나도 집에 간다. 이것은 꽤나 유구하게 전해 내려온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나를 포함해 11-12명 정도 되는 학생회는 이렇게 새내기들에게 우리도 1년 전 만끽했던 광란의 대학 생활을 나름의 안전한 방식으로 제공해 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덕분에 내가 아는 한에서는 어떤 행사에서도 사고가 일어난 적은 없었다.


대학생활 2년 차의 여름, 늦으면 겨울까지 남자 동기들이 나라의 부름을 받아 떠나면 약 2년 간의 광란의 대학생활은 얼추 마무리된다. 후에 나의 친언니는 그 당시의 나에 대해 “미친 개 같았다”고 평했다. 그렇다. 나는 그 중에서도 각별히 모범적으로 미친 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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