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지는 게 아니라, 더욱 더 망가져 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지 지금처럼. - 밍기뉴, <나아지지 않는 날 데리고 산다는 건> 앨범 소개 글 중
이쯤에서 한 번은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7년 반동안 익숙해져 온 시스템이지만 독자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므로.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고시생의 삶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거의 모든 고시생이 학원 가(신림동 고시촌)의 유명한 법학원에서 강의를 들으며 고시를 준비한다. 실강을 듣기 위해 신림으로 이주하는 이들도 있고, 인터넷 강의로 듣는 경우도 많다. 강의는 (2차 과목 한정) 모든 과목이 예비순환, 1순환, 2순환, 3순환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갓 고시생이 된 뉴비 고시생은 3월 초쯤부터 예비순환을 듣는다. 다른 한편에서는 닳고 닳은 고시생들을 위한 3순환 강의가 동시에 시작된다. 2차 시험은 보통 6월 중순에서 말 부근. 이들은 1차 시험을 통과했고, 4개월도 안 되는 기간동안 2차 시험장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마쳐야 한다. 이 4개월이, 초긴장 상태로 두 달 여의 준비를 거쳐 1차 시험을 마친 직후 쉴 틈 없이 이어진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고시 생활 중에서 피를 가장 바짝 말리는 기간은 당연히 시험 직전의 기간인데, 1차 시험(PSAT)이 2월 말이나 3월 초 이루어지므로 시험 준비는 늦어도 1월에는 시작된다. 1차 시험은 헌법과 언어논리, 자료해석, 상황판단의 4과목. 모두 하루에 치른다. 헌법은 60점만 넘기면 통과지만 나머지 세 과목은 점수의 평균을 내서 상대평가를 한다. 헌법과 함께 90분 안에 40문제를 풀어야 하는 세 과목의 시험을 하루에 모두 치른다.
1차 시험은 90%의 타고난 두뇌와 9%의 운, 1%의 노력으로 점수가 산출된다. '피셋형 인간'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안 되는 사람은 기를 쓰고 노력해도 안 된다. 그리고 이 고시판은 '고작' 1차 시험에 기를 써야 하는 사람은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다. 1년 중 10개월을 2차 과목만 공부해도 이미 시간이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게다가 놀랍게도 90분 안에 40문제를 다 푸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와 다름이 없다. 2-3문제를 찍었다면 대단하다고 칭송받는다. 과목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통은 최소 4개 이상을 찍을 수밖에 없다. 한 문제 차이, 소수점 차이로 합격과 불합격이 오고 가는 시험에서 대부분이 문제를 다 풀지 못해 결국 찍기 운이 이토록 비중이 크게 차지하게 된다는 것은 단단히 문제가 있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별 수 있겠는가? 우린 고작 한낱 고시생일 뿐인데. 언제나 결론은 닥치고 공부나 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90분 안에 40문제를 풀어야 하는 불가능한 미션(기출 문제 또는 모의고사)으로 하루에 세 과목씩 후드려 맞는 것뿐.
질리도록 처맞은 기록들 (작년에 드디어 보내줬다)
90분 동안 자신을 극한 상황으로 밀어넣는 것은 혼자 힘으로는 여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보통 1차 시험은 스터디로 준비한다. 고시 초반에는 1차 스터디가 끝나고 집에 와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우는 날이 많았다.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할까. 나는 안 될거야. 나는 왜 피셋형 인간이 아닐까. 나는 왜 고작 이거밖에 안 될까. 극도의 긴장과 절망도 매년 같은 시기에 규칙적으로 맞게 되면 단련이 된다. 음 나는 역시 멍청하군. 이렇게 무덤덤하게 절망하는 고시생이 된다.
1차 시험을 치고 3주 정도 뒤에 시험결과가 나오는데(OMR로 치는 시험인데 왜 이렇게까지 오래 걸리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 기간동안 디씨 행정 갤러리와 각종 고시 커뮤니티를 수시로 들락날락거리며 올해의 커트라인을 가늠한다. 내 점수는 커트라인 안일까, 밖일까. 3순환에 들어가야 할까, 아닐까. 그렇게 매일매일 초조함으로 하루를 점철하는 날을 3주 정도 보내면 시험 결과가 나온다. 3순환(시험 준비)은 시험 결과가 나올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 없으므로, 시험을 치고 일주일 정도 뒤에 3순환 강의가 시작된다. 첫 과목 3순환 강의는 강의를 반 정도 들었을 때쯤(1차 시험 결과가 나온 날) 수강생이 와르르 이탈하는 기현상을 매년 경험하게 된다.
6월 말쯤 일주일 여에 걸친(하루에 한 과목씩 본다) 2차 시험이 끝나면 고시판은 잠시 소강 상태가 된다. 7-8월은 브레이크 타임이라고 할 수 있다.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곧이어 겨울이 올 것이므로 그 전에 충전을 해 둬야 한다. 2차 시험 합격 발표는 10월 중순쯤. 마찬가지로 너무 늦다. 대부분은 9월부터 내년의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이 때 2순환을 듣거나, 필요에 따라 예비순환이나 1순환을 인터넷 강의로 듣기도 한다. 2차 발표가 나면 경사와 조사가 공존하는 고시판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3차는 면접 시험. 여기서부터는 내가 잘 모른다. 겪어본 적이 없으므로. 내가 아는 건 1차나 2차보다는 덜 치열하며, 3차에서 떨어지면 그 다음해 1차 시험은 면제를 해준다는 사실과 그래서 3차에서 떨어진 사람은 대부분 그 다음 해에 합격을 한다는 것 정도.
이것이 나름 성공적이며 착실한 고시생의 사이클이다. 다만 나처럼 1차에서 매번 고배를 마시는 사람은 조금 다른 사이클이 전개된다. 예상치 못하게 분량이 꽤 길어진 관계로 투비컨티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