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의 눈은 오랫동안 녹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는 하고 싶은 것과 관련한 너무 많은 생각이 와글거리고 있었지만, 나 자신을 가장 낮은 진폭 수준까지 억눌러야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리고 상상력을 제한하고 집중하려 고군분투하면서, 내 모든 에너지와 열정을 잃기 시작했다. 매일 한 시간씩 늦게 일어나고, 일에 집중하기는커녕 조금이라도 움직이려면 애를 써야 했다.
- 카밀라 팡,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 중
어느 시점 이후부터는 1차 시험을 1월부터 준비하든 8월부터 준비하든 내 피셋 점수는 결국 거기서 거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피셋 준비는 적당히 늦게 시작하는 것이 심신의 건강에 이로운 선택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늦게 준비를 시작하면 극도의 불안과 초조를 겪어야 한다. 그렇기에 나의 1차 시험 준비는 남들이 그렇게 하듯이 새해를 맞으며 시작되었다. 피셋 스터디를 함께 하는 인원은 거의 고정된 멤버들이 있다. 고시를 시작할 무렵 처음 들어갔던 피셋 스터디에서 몇 명이 추가되고 빠지고 하는 과정을 거쳐 거의 정착된 사람들이었다.
이 기회를 빌려 고백하건대 내 고시 생활의 대부분은 그들과 함께였고(지금도 가까이 지내고 있다) 이는 단지 ‘함께였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대학교의 고시용 기숙사에서도 입사의 시차는 있었지만 결국 같은 건물에서 함께 먹고 자며 삶을 공유했다. ‘식구’라는 단어는 밥을 같이 먹는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는 그야말로 식구였다. 그보다 더 식구일 수는 없었다. 나는 그들 덕분에 때로는 웃기도 하며 고된 고시 생활을 버텨낼 수 있었다. 도통 웃을 일도, 말할 일도 없는 고시 생활에서 함께 모여 밥을 먹고 떠드는 시간은 한 줄기 빛과도 같은 것이었다. 불행 중의 큰 다행이었다.
이들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고시생인 나의 타임라인으로 돌아가 보자. 1차 시험은 대부분 3월 첫째 주 토요일이었다. 두 달 정도의 시간 동안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아침 9시경부터 오후 3-4시 정도까지 기출 문제(또는 모의고사)를 시간에 맞춰 푼 뒤 이를 함께 리뷰하는 스터디를 진행한다. 스터디가 끝나고 개인 공부 시간에는 리뷰한 문제를 다시 한번 정리하고, 필요에 따라 약한 과목에 관한 공부를 추가로 하기도 한다. 같은 문제를 하루에 세 번이나 보는 셈이지만 한 문제씩 꼼꼼히 보다 보면 이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다. 오늘 다 못 본 내용은 내일로 넘어가고, 그러면 내일 문제를 볼 시간이 부족해서 또 일부가 그다음 날로 넘어가고 하는 식으로 밀리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8년 가까이 이 과정을 반복한 나는 결국 기출 문제의 문항과 답을 모두 기억하고 있어 문제를 푸는 것이 의미가 없어지는 지경이 되었다. 문제만 봐도 어떤 과정을 거쳐서 몇 번을 답으로 골라야 하는지, 파노라마 펼쳐지듯 머릿속에 풀이가 펼쳐졌다. 사실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작 본 시험은 불합격이었으니 크게 유의미한 일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험 날에 긴장하는 법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시험 전 일주일 정도는 차라리 빨리 시험을 치고 이 지겨운 피셋을 그만 보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할 뿐. 시험을 치고 나면 당분간은 피셋을 볼 일이 없으니 그게 얼마나 기쁜 일이었는지. 나는 소풍을 가는 기분으로 매해 시험을 치러 갔다. 아침에 시작해서 저녁에 끝나기 때문에 점심을 준비해 가야 한다. 기력 보충용으로 간식거리들도 잔뜩 가져가고, 평소에 가던 열람실이나 스터디룸이 아니라 초면인 시험장(토익처럼 중학교나 고등학교 건물에서 본다)에 가는 게 정말 소풍인 것도 같았다. 수능 날과 비슷하다. 세상 모두가 날 응원해 주는 듯한 기분, 뭔가 대단한 일을 하러 가는 것 같은, 비장하면서도 묘하게 들뜬 기분이었다.
긴장하지 않았기에 평소와 다른 실수를 하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떨어졌을 때의 핑곗거리도 하나 없는 셈이었다. 나는 정말 피셋형 인간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피똥 싸도록 노력한 끝에 항상 커트라인 근처에서 떨어졌다. 2차 시험 준비에 착수해야 하는지 아닌지 가늠할 수 없어 1차 시험이 끝난 후에는 항상 혼란스러운 상태였지만 시험을 그만둘 게 아니라면 어차피 해야 하는 공부라는 생각으로 2차 공부를 하는 편이었다. 물론 실제로 1차에 합격해서 진짜로 2차 준비를 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텐션이 다를 수밖에 없었지만. 술래잡기에서 깍두기가 된 느낌으로(근데 이제 계속 깍두기 상태인) 여름까지 2차 과목들을 함께 공부하곤 했었다.
그렇게 해야 여름이 되었을 때 공부를 하지 않고 쉬어도 죄책감이 덜 했다. 2차 시험이 끝나면 활활 불타던 고시 판은 소강상태가 되고, 그러면 깍두기도 함께 그 소강상태에 딸려 들어가니까. 실제로 2차를 치고 온 친구들이 매우 마땅한 휴식과 충전을 마치고 복귀하는 시기보다 훨씬 앞서서 책 앞으로 복귀해야 하긴 했지만. 그렇게 다시 돌아오면 고시 준비 기간이 길어져도 좀처럼 줄어드는 법은 없는 공부거리들이 나를 환대해 주었다.
참고로 2차 시험은 2시간 동안 한 과목에 대해 10페이지의 서술형 답안을 (백 퍼센트 수기로) 써야 하는 시험이다. 총 5과목으로 필수 과목 4개(행정법, 경제학, 행정학, 정치학)와 선택 과목 1개(조사방법론, 정보체계론, 지방자치론 등등 중에서 하나를 선택)를 쳤었는데, 지금은 선택 과목이 폐지되고 필수 과목만 치는 것 같다. 아마도. 이제 내 알 바 아니게 되어서 나도 잘 모르니 정확한 정보가 궁금하다면 검색해 보시길.
2차 시험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할 얘기가 많지만 TMI가 될 것 같아 룰 설명은 여기까지. 시험을 그만두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을 때로부터 채 2년이 되지 않았는데 그새 기억이 희미해진 부분이 있어서 떠올리는 데 조금 애를 먹었다. 약 1년 반 전의 일이다. 그사이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길래 고작 17개월이 90개월의 존재감을 넘보는 것일까. 약간의 스포를 하자면 나는 그사이에 죽었다가 다시 태어났다. 뭔 소리인가 싶겠지만 이보다 정확한 표현을 아직 찾지 못했다. 나는 다시 태어나야 했고, 다시 태어나려면 한 번은 반드시 죽어야만 했다.
내가 맡은 역할을 잘 해냈던가? 그렇다면 내가 퇴장할 때 박수를 쳐주게.
-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의 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