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0. 다시 만난 세계

길고 암연하던 어둠의 끝에 비로소 나의 세계를 만났다

by 다운
싯다르타는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 찼다. 오랜 꿈에서 깨어났다는 깊은 깨달음이 발가락 끝에 이르기까지 온몸으로 퍼졌다.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고, 마치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처럼 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 ‘이제 나는 싯다르타가 더 이상 나에게서 달아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아트만이나 세상 번뇌로 내 생각과 내 삶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다. (…) 그 어떤 가르침도 나를 가르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 배울 것이다. 나는 스스로 나의 제자가 될 것이다. 나는 나를, 싯다르타라는 비밀을 알아낼 것이다.’ 그는 마치 처음으로 세상을 보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상은 아름다웠고, 세상은 찬란했으며, 세상은 수수께끼 같았다! 여기에 푸른색이, 저기에 노란색이, 또 저기에 초록색이 있었고, 하늘이 흘러갔고, 강이 흘러 갔다. 숲이 솟아 있고, 산이 솟아 있었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모든 것이 수수께끼 같았고, 마술 같았다. 그 한가운데서 싯다르타, 각성자인 그는 자기 자신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 모든 것, 그 모든 노란색과 푸른색, 강과 숲이 처음으로 눈을 통해 싯다르타 내면으로 들어왔다.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중


그날 문득 부엌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 팬케이크 가루가 보였다. 기존의 팬케이크 가루와 달리 작은 페트병에 담긴 형태로 물이나 우유를 통에 부어 흔들어 반죽을 만든 후 프라이팬에 조금씩 부어서 팬케이크를 만드는 방식이었다.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탓에 먼지가 조금 쌓인 병을 집어 들어 휴지로 닦아 내자 유통기한이 보였다. 1년이 넘게 지나 있었다. 팬케이크 병은 언제나 시야 안에 쉽게 들어오는 위치에 있었지만 1년이 훨씬 지나도록 먼지만 쌓이고 있던 건 이유가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팬케이크를 좋아했다. 아니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쭉.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기어코 먹겠다고 할, 몇 안 되는 음식일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팬케이크를 먹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건강에 안 좋을 뿐 아니라 칼로리가 높아 살이 찔 거라는 흔한 이유였다. 게다가 내가 초등학교에 가기 전에는 아주 가끔이지만 팬케이크를 포함해 이런저런 간식을 만들어주기도 했던 엄마는, 내가 학교에 다니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간식을 해주기는커녕 얼굴을 보기도 힘들어졌다. IMF였다.


그때부터 나는 주로 집에 혼자 있었다. 내가 팬케이크를 해 먹겠다고 야단법석을 떨어도 나무랄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어렸던 나는 어떻게든 팬케이크를 해 먹겠다는 열망뿐, 그 야단법석의 흔적을 말끔히 치워놓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늦은 시간 집에 들어온 엄마는 팬케이크를 해 먹었냐고 묻고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암울한 표정으로 부엌을 치웠다. 엄마는 내가 아니어도 충분히 힘들었다. 아니, 나를 먹여 살려야 해서 힘들었다. 그러니 나는 팬케이크를 만들어 먹어서는 안 됐다. 그것이 채 10살이 되지 않은 내가 알게 된 자명한 진실이었다. 엄마는 그날 다시는 팬케이크를 하지 말라고도, 먹지 말라고도 하지 않았지만 그냥 알았다. 나는 존재 자체가 짐이고 죄인이라는 걸.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날의 차가운 감각을 잊어버렸던 것 같다. 엄마가 내게 먹고 싶은 걸 사 오라고 했고, 나는 그날따라 팬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내가 아는 팬케이크 가루를 살 생각이었지만 옆에 있던 그 제품이 눈에 띄었고 이거라면 손이 덜 가니까 덜 싫어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마는 더 싫어했다. 이건 돈을 낭비하는 짓이고 사치라고 했다. 그렇게 팬케이크 가루가 담긴 그 병은 찬장 구석에 처박혔다. 엄마는 다시는 이런 걸 사 오지 말라고 했다.


그날 나는 그 병을 열었다. 유통기한이 좀 지나긴 했지만 가루니까 괜찮겠지. 맛이 이상하면 안 먹으면 되지 뭐. 병에 표시된 눈금까지 우유를 붓는다. 뚜껑을 돌려 닫고, 요령껏 흔들어 풀리지 않은 가루 덩어리가 없도록 확실히 섞어 준다. 프라이팬에 버터를 녹이고, 달궈진 팬의 가운데로 반죽을 천천히 그리고 적당히 붓는다. 불은 최대한 약하게. 뒤집개를 한 손에 들고, 반죽이 익었다는 신호를 기다린다. 하얗고 맨질하던 반죽에 기포가 올라오기 시작하면 아래쪽은 다 익은 것이다. 프라이팬을 살살 흔들어 케이크가 팬 위를 매끄럽게 움직이는지 확인한 다음 아래쪽으로 뒤집개를 밀어 넣고 한 번에 뒤집는다. 너무 세차게 뒤집으면 아직 익지 않은 윗부분의 반죽이 온 사방 튀기 십상이니 살포시 뒤집어야 한다. 반죽은 윗부분을 제외하고는 이미 거의 익은 상태라 뒤집고 나서는 살짝만 익히면 된다. 뒤집개로 살짝 들어 봤을 때 갈빛이 돌면 케이크는 완성이다. 평평한 접시에 완성된 케이크를 옮긴다. 그렇게 몇 번 더 반복해서 3-5장의 케이크를 만들어낸다.


내가 팬케이크를 먹는 방식은 웹툰 ‘오무라이스 잼잼’을 접하고 깨달음을 얻은 이후로는 늘 조경규 아저씨의 방식을 따른다. 내가 더한 나만의 노하우까지 있어서 그 방식은 이제 내게 궁극의 완전체다. 가지런히 쌓여 있는 팬케이크를 하나씩 해체해서 그 위에 버터를 잘 바른 후 여기저기 포크로 케이크에 살짝 구멍을 뚫어놓는다. 그 위에 다시 한 장을 올리고, 똑같이 반복. 세 장이 딱 적당하다. 마지막 세 번째 케이크까지 버터를 바르고 포크로 몇 번 콕콕 찌른 후에 메이플 시럽(혹은 꿀, 설탕 시럽, 팬케이크 시럽 등등)을 천천히 맨 위에 부으면 뚫어놓은 구멍 사이사이까지 시럽이 잘 스며든다. 팬케이크에 버터와 시럽은 필수인데, 버터를 바르면 표면에 기름칠이 된 셈이라 시럽이 주르륵 흘러 버리기 때문에 구멍을 뚫은 것이다. 조각 케이크처럼 한 조각을 잘라내면 시럽과 버터를 듬뿍 머금은 세 장의 팬케이크로 구성된 단면이 보인다. 세 장이 겹친 그 조각을 그대로 한입에 넣는다. 한입에 넣는 것이 포인트다. 입안에 한가득 머금고 씹으면 팬케이크의 폭신한 식감과 달콤한 메이플 시럽의 맛과 향, 버터의 풍미가 이루는 절묘한 조화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


행복하네. 행복하구나, 나. 나는 팬케이크를 먹을 때 행복한 사람이었어. 이건 ‘나의’ 행복이구나. 엄마가 싫어해도, 먹고 나면 살이 1킬로쯤 찐다고 해도 내가 팬케이크를 이렇게 좋아한다는 사실이랑은 상관없는 거였구나. 나의 행복은 오롯이 나의 것.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 강요할 수도 없는, 나만의 것이었구나, 이건.


그날 팬케이크를 먹으면서 바라본 창밖은 한낮이었고 햇살이 비치는 세상이 그곳에 있었다. 나의 세상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었고, 나는 이제 막 그곳에 도착한 참이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다르고 새롭게 보였다. 모든 것이, 말 그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저마다의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중 어느 것도 겹치는 색은 없었다. 그리고 이제야 처음 들여다본 나의 행복 역시 이 세상 무엇과도 다른 색으로 빛을 내고 있었다.

keyword
이전 11화9. 살기 위해 죽는 법과 죽기 위해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