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보이지만 뛰어들 순 없어
별난 슬픔과 더러운 인간사, 그리고 삶이 그토록 비참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근사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 – 헤르만 헤세
(아마도) 모든 대학교 학칙에는 '재학연한'이라는 게 있다. 재학 기간과 휴학 기간을 모두 합쳐서, 그 안에는 졸업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적, 쉽게 말해 퇴학당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재학 연한은 꽤 많이 길다. 우리 학교는 10년이었다. 그리고 나는 대학교에 입학한 지 9년 6개월이 지나서야 졸업장을 받았다. 대학교를 10년 가까이 다니다니.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동안 학교의 지원을 받으려면, 하다못해 열람실이라도 이용하려면 학교에 적을 두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보다 쿨하게 졸업할 수 있었던 건 대학원 진학이 확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행정학이란 학문에 별 뜻은 없었다. 전혀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때가 고시 준비를 시작한 지 7년 차. 나는 아직 고시를 포기하지 않은 상태였고, 그 대학교에는 행정학 석사 과정에 공직 준비 트랙이 있었다. 행정학 교수님들이 행정고시를 적극 지원해준다고? 대학원에 간다는 건 내가 생각했던 미래의 선택지 안에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지만, 오로지 고시를 계속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대외적이고 공식적인 백수가 되지 않기 위한 결정이었다. 어디에라도 적을 두고 있지 않으면, 고시를 그만두는 순간 나는 그냥 쌩백수가 되니까. 삼십을 코앞에 둔 나이. 그건 생각만 해도 아찔한 상황이었다.
대학원엔 고시반이 있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고시반의 주임 교수님을 지도 교수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말이 모시는 거지, 사실 그냥 지도 교수 란에 어떤 이름이 적혀 있느냐의 문제였다. 나는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한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교수님은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잘해주시는 거지? 싶을 정도로 내 시험 준비를 든든하게 지원해주셨다. 내가 최후의 수단으로 대개의 수험생이 응시하는 일반 직렬보다 1차 시험의 커트라인이 낮았던 소수 직렬로 갈아탈 때도, 그마저 한 문제 차이로 떨어지는 바람에 7급 시험에 응시할 때도. 기회는 일 년에 한 번뿐이었고 나는 이미 장수생이었으니 직렬을 바꾸는 건 엄청난 리스크를 감수하는 일이었다(2차 과목 5개 중 3과목을 새로 공부해야 했다). 결과적으로는 둘 다 떨어졌으니 그 결정이 유의미했다고 보기는 힘들겠지만 적어도 최선이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보고 털었기 때문에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으니까.
고시생이란 타이틀을 내려놓고 나니 내게 남은 건 대학원생이라는 이름뿐이었다. 대학원생이긴 한데 연구를 본격적으로 해본 것도 아니고 영락없는 낙동강 오리알이군. 그렇게 자조적인 태도로, 기왕 들어왔으니 학위라도 가져가자 싶은 마음으로 학기를 다녔다. 그렇게 어언 대학(원)생활 11년 차, 놀랍게도 나는 공부하는 것이 처음으로 즐겁다고 느꼈다. 점수에 목을 메거나 암기하느라 교과서와 씨름하지 않아도 되는, 그저 공부를 위한 공부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렇구나. 나는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어. 공부가 너무 하기 싫어서 날마다 겉으로 안으로 눈물을 흘리던 나를 7년 반 동안 후려치면서 살아왔으니, 내가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점수가 매겨지고 정답이 정해져 있는 공부가 아니라, 공부해봤자 딱히 쓸모는 없는 것들에 대해 궁금해하는 마음이 그저 어디든 갈 수 있게 내버려두면 되는, 그런 공부를 하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란 사실을 몰랐을 뿐이었다. 시험에 도움이 안 되는 공부는 내게 언제나 낭비였고 금기였으니까.
앞에서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다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은 이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것만 해도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이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오랜 염원을 10년 만에 (내가 바랐던 것과는 다른 형태지만) 이루게 된 것이 꽤 벅찬 일이기도 했다. 정문을 지나칠 때마다 보이는 거대한 조형물을 마음에 새기며 차오르는 학교뽕의 맛이란…
집에서 대학원은 족히 한 시간 반은 걸리는 거리였기 때문에 한번 갔다 오려면 다음 날의 에너지까지 끌어다 써야 했다. 최대한 수업을 같은 요일로 몰아놓으니 학교에 가는 날은 일주일에 많아야 이틀 정도였다. 이틀은 대학원생, 나머지 5일은 취준생(이자 백수). 일 년만 더 지나도 취업은 사실상 어려울 거라고들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때 이미 취업은 어려운 상태였다. 서류조차 한 번도 통과해본 적이 없었다. 녹록지 않은 학업에, 생활비 때문에 생업(알바)까지 병행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나는 몸이 3개인 사람처럼 살았다.
고시를 준비하면서 축나버린 지 오래인 몸과 마음의 건강을 영끌하여 '1년 안에 취업'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달성해야 한다는 목표 하나만 보고 살았다. 몸도 마음도 비명을 지르고 있었는데 나는 몰랐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