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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종으로 태어난 사시나무

(이 깃발도 내가 만듦)

by 다운
사랑을 두려워하는 것은 삶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삶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산송장이나 다름없다.
- 버트런드 러셀


아이들이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다면, 애정결핍으로 인한 것일 수 있다는 얘기를 TV에서 본 적이 있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다만 누군가가 나를 볼 수 있는 상황에서는 물어뜯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이상하게 보이면 안 되니까. 나는 멀쩡하고 반듯한 아이여야 하니까.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난 뒤에는 야자를 해야 했으므로 누군가가 나를 볼 수 있는 상황이 눈을 뜨고 감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그러니까 고등학교에 가고 나서야 그 버릇을 고칠 수 있게 된 것이다. 17살 때부터 나는 손톱을 물어뜯지 않았다(못했다). 손톱이 손끝을 넘어서 자라고, 나는 손톱깎이로 손톱을 깎아내는 당연한 날들이 처음으로 이어졌다. 자라고, 깎고, 자라고, 깎고, 자라고, 깎고.

드디어 자라는 손톱을 가지게 된 청소년 다운

그렇게 내 손톱은 비로소 자라나기 시작했다. 웃자란 손톱은 깎아내면 되지만 퇴적암처럼 차곡차곡 층을 더하며 자라나는 마음의 결핍은 깎아내는 법을 몰랐다. 정확히는 그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기에,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사실 역시도 인지의 영역 밖에 있었다.


내 기억이 허용하는 과거까지 거슬러 가면 그곳에는 칭찬과 애정을, 관심을 갈구하는 아이가 있었다.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예의범절 바르고, 착하고, 영특한 아이. 동네 어른들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해야 한다는 도덕 시간의 속 없는 권고에도 움직이는 아이였다, 나는. 동네를 지나며 마주치는 어른들에게 매번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여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는 싹싹한 어린이. 그게 나였다.


초등학교에 진학하고, 선생님과 친구들의 관심과 애정을 한 번에 획득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은 학급 회장(반장)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으로 중등 교육을 마칠 때까지, 나는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임명장을 받았다. 어쩌다 부회장이 됐을 때는 속이 쓰리긴 했지만. 이런 것도 매번 하는 사람이 한다고, 나름 노하우가 쌓여 대개의 경우에는 회장이긴 했다. 모범상 같은 건 셀 수도 없이 받았다. 나는 가장 최선의 ‘착한 어린이’였다.


지금에 와서야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뒤늦게라고 하기엔 너무 많이 늦긴 했지만, 나는 낯을 가린다. 지금이야 여기저기서 자의로 타의로 굴러다니면서 낯을 가리지 않는 척하면서도 최소한의 에너지만을 소모하는 법을 체득한 상태지만, 어릴 때는 그러질 못했다. 특히 아주 어린 나이, 단체 생활도 하지 않을 시기부터 낯을 많이 가리는 아이였던 것 같다.


이렇게 낯을 가리는 성격과 애정 내지 관심에 대한 필사적인 갈망은 상성이 좋지 않았다. 회장으로서, 학생회로서, 뭐로든 간에 나는 앞에 나서야 할 일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얼마나 심장이 크게 뛰었는지, 내 목소리가 얼마나 떨렸는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떨면 안 돼. 떨면 안 돼. 떨지 마. 간절하게 애원해도 애초에 이 몸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작동하는 것이었고, 내가 떨고 있다는 걸 인지하는 순간 떨림은 더욱 심해졌다.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지고, 손이 떨리고, 식은땀이 났다. 내가 그토록 갈망하는 관심이었지만 막상 관심을 받게 되었을 때는 제대로 된 상태로 있을 수 없었던 때였다.


대한민국 새내기라면 파마/염색이 국룰

그래도 그게 무엇이 됐든 간에 무수히 반복하는 것은 체득의 관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새터(새내기새로배움터, 일종의 MT이자 수련회)에서 우리 과, 우리 학번의 대표가 되겠다고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소찬휘의 tears를 부르면서 떨렸던 목소리, 환호성이 들리던 순간을 기억한다. 내 마음속의 관종이 기쁨과 환희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우리 과의 뻔대(학번 대표를 칭하는 줄임말)가 되었다.


성인이 되고 처음 시작하는 단체 생활, 모두가 낭만으로 기억한다는 대학 생활의 시작이 나름 내 의지대로 진행되어 원하는 곳에 익숙한 단추를 끼웠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나는 ENTJ. 핵E였고 핵인싸였다(지금은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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