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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 뭐 돼?

응. 전부. 많이.

by 다운
그거 기억나? 나 초등학교 때 장래 희망 적으라고 할 때 막 열 개씩 적었던 거. 그땐 되고 싶은 게 뭐가 그리 많았을까? 삼십이 넘은 나는 지금 그중에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지만, 지금 보니 내 이름 앞에 그중 뭘 갖다 붙여놔도 이상하지는 않겠다 싶어. 좀 이상한 말이지? 근데 진짜 그래. 그러니까 8살의 나한테 말해줄래. 20년 뒤쯤, 넌 그걸 전부 이룬다고. 그러고도 모자라, 더 많은 것을 이뤄낸다고.
- 2023. 10. 30. 저녁, 광주에서


알람 없이도 아침에 일어날 수 있다는 건 어른이 되었다는 뜻일까.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6시에서 7시 사이, 늦어도 8시쯤에는 절로 눈이 떠진다. 잠자는 시간을 8시간으로 설정해 놓은 것처럼, 잠든 때를 기준으로 8시간 정도가 지나면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칼 같네. 오늘 일어난 시간은 6시 반. 어젯밤 책을 읽다가 비몽사몽이 된 채 잠자리로 들어간 게 10시 반쯤. 이 몸은 철저하게 자기만의 규칙대로 움직인다. 나는 아직 그 규칙을 다 모른다. 그래도 요 근래에는 열심히 알아가는 중이다.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칫솔에 치약을 묻혀 입에 물고 화장실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세면대 앞에 얌전히 서서 양치질을 마치는 일은 거의 없다. ADHD를 진단받은 나의 뇌는 그런 단순한 반복을 가장 싫어한다. 화장실에 꼼짝 않고 서서 양치질을 하자면, 1분도 못 버티고 끝나버리고 말 것이다. 칫솔을 대충 움직이면서 커피 내릴 물을 불에 올린다. 그리곤 커피 서버에 드리퍼를 올리고, 드립 필터 가장자리를 반듯하게 잘 접어 드리퍼에 쏙 넣는다. 아침의 커피를 디카페인으로 바꾼 건 최근의 일이다. 나는 이제 아침 커피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항불안제 없이는 평화로운 밤을 보낼 수 없는 불안 장애를 가진 사람이기도 하니까. 대형 마트에서 저렴하게 파는 디카페인 원두를 쟁여두고 일주일 정도 분량을 미리 갈아 둔다. 커피 가루는 스푼으로 2번, 총 20g을 넣는다. 종일 마실 생각으로 500ml를 한 번에 내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는커녕 오후가 되기도 전에 커피는 동나고 만다. 물은 슬슬 끓을 준비를 하고 있다. 긴 양치질을 마무리한 후에 냉장고에 붙여 놓은 정신과 약을 먹는다. 항우울제, 항불안제, ADHD 치료제로 푸짐한 약봉지. 약은 아침저녁으로 먹는데, 아침 약과 저녁 약을 번갈아 줄 세워 냉장고에 붙여 놓는다. 정신과 약물 치료도 이제 9년 차. 이렇게 해 놓지 않으면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까먹기 일쑤이기 때문에 떠올려 낸 묘책이다. 약을 먹고, 약봉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뒤돌아서 문득 약을 먹었는지 기억이 안 나 쓰레기통을 열어보는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이제 창가 쪽 한 켠에 인센스를 피워 놓고 커피를 내리기 시작한다. 한 번 물을 부으면 다 내려오기까지 시간이 약간 소요되기 때문에 짬짬이 아침 식사 준비를 한다. 최근의 아침 식사는 사과 두 알. 사과 껍질이 몸에 좋다는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나는 껍질 없이 먹는 게 더 좋으니까 예쁘게 깎아준다. 그렇게 사과를 깎다가, 아 맞다 커피. 또 물을 붓는다.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내려도 괜찮다. 제일 저렴한 원두를 샀기 때문에 공들여 내린 커피든 개판으로 내린 커피든 내 후각과 미각을 총동원해도 어차피 구별을 못 한다. 나에게 드립 커피는 두 종류뿐이다. 로스팅한 지 얼마 안 된 원두를 막 갈아서 바로 내린 커피와 나머지. 어쩐지 활어회 같은 느낌이지만.



그렇게 커피 향과 인센스 향, 빵을 먹는 날에는 빵 냄새까지 함께 하는 이 아침은 이제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혼자 산 지 15개월 차, 이렇게 나는 내 삶을 기초부터 차근차근 다시 세우는 중이다. 비록 대출투성이인 삶이어도. 그것까지도 내 삶이란 것을 배워가고 있다.


일과 시간이 시작되는 건 10시쯤. 일기를 쓰고, 탁상 달력의 일정도 정리하고, 항상 들고 다니는 메모장에 어제 적은 것 중에 기억해 둘 만 한 것들을 노션 아카이브에 입력해 놓는 회고 작업으로 가볍게 일과를 시작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썼던 글을 퇴고하고, 새로운 글 혹은 쓰던 글을 이어서 쓴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틈틈이 찍은 사진들도 이때 정리해 두고 괜찮은 것들은 그래픽 작업을 하거나 적당히 보정해서 스톡 이미지 사이트에 올린다. 아직 돈은 안 되고 있지만. 하다 보면 언젠가는 되겠지 뭐.


언뜻 보면 굉장히 규칙적이고 체계적인 생활 같아 보이지만 사실 이런 루틴이 잡힌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장장 15개월 치의 시행착오를 거쳐 다듬고 다듬어 만들어진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를테면 생산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서 어떤 환경이 필요한지, 책상 위치는 어떻게 정해야 하는지, 오전-오후-저녁에 각각 어떤 종류의 일을 하는 것이 효과적인지 하는 것들을 하나씩 알아가면서 말이다. 그러니 아직 완성된 것도 아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완성되지 않겠지. 내가 마주하는 매 순간의 ‘나’는 내가 알았던 ‘나’와는 또 다른, 새로운 ‘나’일 테니까. 다만 이런 ‘나’와 발맞춰 살아가는 일이 나의 삶 자체란 것을 잊는 일이 없기만을 바란다. 나는 이제서야 ‘나’를 찾았으니까. 어렵고 고통스럽게, 절망 끝에서 비로소 찾은 ‘나'를 이제 다시는 잃어버리고 싶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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