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얼마나 큰 약점인가. 절망에서의 탈출 뒤에 온 희열이란 또 얼마나 서글픈 찰나인가. -박경리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동네가 있기 마련이다. 나에겐 중랑구가 그랬다. 중랑구에서도 특히 면목동 등지. 중랑구 역시, 서울의 많은 동네와 마찬가지로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우리 동네는 그게 좀 더뎠다. 어릴 때 살았던 동네에는 아직까지도 변하지 않고 있는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더 많다. 이를테면 편의점이 아닌 ‘슈퍼마켓’, 간판이 아직 붙어있는 게 신기한 ‘컴퓨터세탁'소,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앞 ‘떡볶기' 집. 나는 이것들이 최대한 오래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어주길 내심 바란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그것은 이른바 ‘빨간 벽돌집’이라고 하는, 판박이처럼 비슷비슷한 집들과 연관이 있다. 나무 혹은 쇠로 되어 여닫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창틀, 촘촘한 창살 너머로 시멘트 벽만 보이는 창문, 변기를 향한 계단이 있는 화장실. 나는 그런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영화 ‘기생충’을 보면서 알고 보면 어린 시절의 내가 ‘반지하 냄새’가 났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높은 계단을 차곡차곡 올라가야만 변기에 앉을 수 있는 집은 반지하에만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 집은 지상에 있었지만 단칸방이었고 화장실이 집 밖에 있었고 오래된 수세식 화장실이었다. 그다음 집은 방은 2개나 있었지만 반지하였다. 그리고 화장실엔 양변기가 있었지만 ‘높이 있었’다. 아직 작았던 나에겐 화장실에 가는 것이 꽤나 도전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때 그 곳에는 이런게 아주 흔했다(화려한 무늬의 돗자리에 널려 있는 홍고추도).
그래도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내가 가난하게 살고 있는 줄 몰랐다. ‘빈부 격차’ 내지는 ‘소득불평등’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기도 전에 어떤 친구들과 괴리감을 느끼기 시작했던 건 뺑뺑이가 잘못되었는지 동대문구로 배정받아 다녔던 고등학교에서였다. 스투시, 롱샴, 쥐샥, 그런 브랜드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나에겐 그게 하나도 없다는 것도. 입시로 기회균등 전형을 준비하며 주지의 사실은 나에게 일종의 사명을 내렸다. 개천에서 난 용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 차상위계층, 한부모가족, 반지하 같은 단어를 떼고 그냥 평범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SKY에 가야 했다. 아니 서울대에 가야 했다.
중학교를 다닐 때도 공부를 나름 잘하는 편이었던 나는 고등학교 입학 당시에 쳤던 일종의 반배치 고사에서 나쁘지 않은 성적을 받았다. 그 덕분에 우등반에 자동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우등반을 담당했던 J선생님은 말하자면, 영화 ‘위플래시’에서의 그 인물과 같은 사람이었다. 구체적으로 따지면 그 인물보다는 좀 더 상냥한 버전이긴 했지만. J선생님은 내가 당근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아이라는 걸 빠르게 파악했다. 그 덕분에 나는 내가 가진 체력과 역량 그 이상을 공부에 투입할 수 있었다. 뉘앙스에서 눈치챘겠지만 몇 번이고 다시 돌이켜봐도 절대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다.
2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정신과에 발을 들이고 내가 오래전부터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앓아왔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30대에 들어서고 나서야 내가 ADHD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정말 무진장 애를 썼던 것이다. 내가 수업 시간에 얼마나 많이 조는 아이였는지 우리 반 애들은 모두 알았다. 내 짝꿍이 된 아이는 항상 그런 나를, 졸음과 매번 죽음의 사투를 벌이는 나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역할을 도맡았다. 나는 그 3년 동안 졸음과 눈물겹고 피나는 사투를 벌였다. 오죽하면 졸 때마다 허벅지를 펜으로 찔러 말 그대로 피가 나는 지경이었다. 당시에는 몰랐던 불안장애는 더 이상 참지 못 하고 고3 때부터 내 몸을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깨가 수시로 들렸다 내려갔다를 반복하고 고개를 도리도리 쉬지 않고 휘저었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렇게 나는 정말 목숨 걸고 피 땀 눈물을 흘려가며 공부를 했다. 걸어가면서 잠을 잔다는 게 뭔지 아는가? 나는 안다. 공부하다가 토해본 적 있나? 나는 있다. 심지어 좀 많다.
그러나 나는 서울대를 가지 못 했다. 서울대만 바라보고 달려왔던 내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실패였으나 그래도 SKY 안에 들었다는 사실로, 그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나는 나를 달랬다. 그래, 이미 나는 상위 0.1프로야. 어찌됐건 간에 이제 나는 탄탄대로에 들어선 거야. 나는 희망이 될 거야. 이 개천, 아니 진흙탕에서 탈출해서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닐 거야.
그래도 난 어쩌면 내가 이 세상에 밝은 빛이라도 될까 봐
어쩌면 그 모든 아픔을 내딛고서라도 짧게 빛을 내볼까 봐
포기할 수가 없어 하루도 맘 편히 잠들 수가 없던 내가
이렇게라도 일어서 보려고 하면 내가 날 찾아줄까 봐
얼마나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바랬을까
- '나의 사춘기에게' 가사 중, BOL4
그래. 탈출 좋지. 하지만 그렇게 됐다면 이 글은 쓰이지 않았겠지.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영영 모르는 채로 살았을 것이다. 대학교 입학. 그것이 내게 준 자유와 행복이 시한부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어쩌면 알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