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종내 가야 할 곳이 차디찬 심연의 밑바닥이란 것을 알았을 때 그를 뒤덮은 감정은 비통함보다는 해방감에 가까웠다. 앞을 보지 못하는 제 아비를 돌보는 일이 자신의 숙명이자 미래라고 여겼던 마음에 광명이 비쳤다. 이 죽음은 자살도 타살도 아닌 승화로 남을 것이다. 가엾은 아비는 자신을 대신해 남은 재물로 말미암아 충분한 보살핌을 받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낱낱이 구원이었다.
“아버지.”
그는 어렵게 입을 떼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어렵게 제게 주신 이 목숨을 돌려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심 씨는 말없이 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그것만이 제 마지막 소망입니다.”
담담하게 전한 단어들이 그의 눈에 맺혔고 그로 인해 구태여 전하지 않은 감정이 모습을 보였다. 그것은 십여 년 전의 그에게서 딸아이에게 전해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딸과 함께 암암한 바다에 용해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