쥘리에트 휴렐, 엘렌 쿠베르 <Compositrices>
그녀가 여성이라는 것이 불치의 결점이라 여겨지지 않는다면, 이 곡들은 분명히 유명해졌을 것이다.
-카미유 생상스가 클레망스 드 그랑발(Clémence de Grandval)에 대해-
드 그랑발 외에도 비슷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프랑스는 19세기 후반부터 음악 교육 기관인 파리 음악원(Conservatoire de Paris) 을 통해 여성들에게도 정식 음악 교육을 제공했지만, 작곡가로서 활동하는 길은 여전히 험난했다. 성별이 하나의 결점으로 여겨지던 시대에 꾸준히 창작을 이어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오귀스타 올메스(Augusta Holmès) 는 리스트, 바그너, 생상스로부터 찬사를 받았으며, 1889년 만국박람회를 기념해 1,000명이 넘는 연주자를 위한 대규모 작품을 작곡했다. 멜라니 보니스(Mel Bonis) 는 음악원 재학 중 성악가와 열렬한 사랑에 빠졌으나, 결국 부유한 사업가와 결혼해야 했고, 이후 다시 작곡 활동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성별을 숨기기 위해 ‘멜 보니스(Mel Bonis)’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세실 샤미나드(Cécile Chaminade) 는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비제는 그녀를 ‘나의 작은 모차르트’ 라고 불렀다. 릴리 불랑제(Lili Boulanger) 는 언니 나디아 불랑제에게 음악을 배웠으며, 1913년, 열아홉 살의 나이에 여성 최초로 로마 대상을 수상했다. 이 음반은 충분한 주목 받지 못했던 프랑스 여성 작곡가들의 작품을 재조명한다. 음반의 제목인 'Compositrice'는 여성 작곡가를 뜻한다.
쥘리에트 휴렐(플루트)과 엘렌 쿠베르(피아노) 는 완벽한 호흡을 자랑하는 듀오이다. 여러 장의 음반을 통해 이미 알파(Alpha) 레이블의 팬들에게 익숙한 연주자들이다.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플루티스트 인 휴렐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플루티스트 중 한 명이다. 모든 레퍼토리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연주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프랑스 작품을 듣고 싶을 때면 자연스럽게 휴렐의 해석을 찾게 된다. 들으면 들을수록 ‘이것이 프랑스 음악이다’ 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휴렐의 음색은 기본적으로 깨끗하고 가볍다. 꾸밈이 없으며, 모든 음역대에서 균일한 밀도를 유지한다. 특히 그녀의 연주와 프랑스 작품이 만나면, 얼굴 가까이로 가볍게 바람이 스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언제 들어도 좋고, 부담이 없다. 피아니스트 엘렌 쿠베르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솔로 연주는 물론, 실내악의 전문가로서 뛰어난 음악성과 세심한 연주 스타일을 갖고 있다. 특히 프랑스 음악에 대한 해석이 깊고 정교하다. 두 연주자는 작품을 정확하고 균형 잡힌 온도로 대한다. 과하게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내면에서 섬세하게 노래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절대 더 뜨거워지지도, 더 차가워지지도 않는다.
두 사람은 각별한 애정을 담아 작곡가와 작품을 선정하며, 20세기 전환기에 활동했던 다섯 명의 프랑스 여성 작곡가들을 조명한다. 음반의 시작을 여는 멜 보니스의 작품은 제법 규모가 있는 소나타이다. 부드럽게 시작하는 이 음악은, '멜랑콜리' 그 자체이다. 2악장의 유머러스한 스케르초 악장을 지나, 아름다운 3악장에 주목해보자. 전반적으로 수평적으로 펼쳐진 음악 위에서, 가끔 등장하는 극적인 도약이 감정을 강하게 드러낸다. 불길한 분위기로 시작해 찬란한 마지막을 맞이하는 4악장 또한 인상적이다.
이어지는 곡은 릴리 불랑제의 짧은 두 작품이다. 그녀는 칸타타 Faust et Hélène(파우스트와 헬렌)으로 로마 대상을 받았으며, 이는 당시 여성 작곡가로서는 혁신적인 성과였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1918년, 24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소박한 구성을 지닌 두 개의 플루트 곡을 듣다 보면, 그녀가 로마 대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첫 곡 녹턴에서는 단순한 음형을 반복하는 피아노 위로, 가녀린 플루트 선율이 끊임없이 노래한다. 아름다운 기억을 떠올리다 스르륵 잠에 빠지는 듯한 모습이 그려진다. 봄의 아침 또한 불랑제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곡이다. 다소 긴장감 있게 시작하는 음악은, 머지않아 봄의 만물이 만개하는 모습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한다. 반짝거리는 플루트 음색이 특히 빛을 발한다.
생상스가 극찬을 했던 작곡가, 클레망스 드 그랑발은 백작부인이었다. 약 60여 곡의 가곡과 함께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을 위한 실내악 작품을 작곡했고, 특히 오보에 협주곡과 실내악 작품 들이 오늘날 다시 주목받고 있다. 5개의 모음곡들은 하나같이 고급스럽고 우아한 매력을 뽐낸다. 모든 곡이 초반부터 귀를 사로잡는다. 음악을 유심히 듣다 보면 작곡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느껴질 때가 있다. 클레망스 드 그랑발 백작부인은 분명 아주 온화한 성품과 깊은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음악 안에서 고스런히 전해진다.
음반의 마지막에는 오귀스타 올메스의 3개의 소품이 담겨있다. 이 음반에는 작은 소품이 담겨 있지만 올메스는 대규모 작품을 쓰던 작곡가였다. 특히 1889년 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를 기념하여 1,000명이 넘는 연주자가 참여한 대규모 교향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바그너와 리스트의 영향 아래 그녀는 자신의 시대에서 독창적인 작곡가로서 자리를 잡았다. 3개의 소품 중에서 두 번째 곡은 '달빛'이다. 이 음악을 듣는 순간 음악 속으로 강하게 빠져들었던 것 같다. 세상 어느 작곡가의 '달빛'보다 아름답다.
모든 음악들이 하나같이 아름답다. 프랑스의 여성 작곡가들이 바라본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웠을까? 과거의 작곡가들은 악보만 존재한다면 연주자들을 통해서 언제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시도는 중요하고 또 감동적이다. 프랑스 출신의 플루트 피아노 듀오는 이 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한 세기가 훌쩍 지나버렸지만 지금도 이 여성 작곡가들의 창조물은 여전히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준다. 이 음반은 이런 가치를 인정받아 프랑스 뮈지크(France Musique)에서 2월 한때 ‘오늘의 CD’ 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많은 애호가와 평론가들로부터도 많은 찬사를 받고 있다.
Essential Track | 14번 트랙 (별의 세레나데, Sérénade aux étoiles, Op. 142)
세실 샤미나드는 프랑스 출신의 여성 작곡가로 아름다운 음악세계를 창조해냈다. 그녀는 작곡과 피아노 연주에서 모두 뛰어난 능력을 보였으며, 가곡과 피아노 작품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플루트 콘체르티노는 거의 모든 플루티스트가 거쳐가게 되는 명곡이다. 이 음반에는 그동안 덜 알려져있던 <별의 세레나데>라는 곡이 담겨있다. 샤미나드는 최소의 음과 단순한 화성으로도 아주 특별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 작품을 듣다 보면, 비제가 왜 그녀를 '작은 모차르트' 라 불렀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https://youtu.be/v_5Xvx7maY0?si=qdXfMh1d9tTrIxhE
글 안일구, 사진 김신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