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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트, 마지막까지 브람스

포크트, 테츨라프, 분트로크 <브람스 피아노 4중주 2, 3번>

by 안일구
Ondine, 2024
"오늘 라르스는 브람스의 손에 이끌려 천국으로 갔습니다. 편히 쉬세요."

-라르스 포크트가 세상을 떠난 날, 한 음악팬이.


2022년, 피아니스트 라르스 포크트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프로젝트 중 하나는 사랑하는 동료 음악가들과 함께 브람스의 피아노 4중주를 녹음하는 것이었다. 포크트는 암 투병 중에도 녹음을 이어갔으며, 이 음반은 그의 사후인 2024년에 발매되어 유작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한 음악가가 마지막까지 품었던 삶과 음악에 대한 깊은 애정이 한 장의 음반에 고스란히 담겼다.


브람스의 실내악은 웅장함과 서정성, 그리고 고요한 열정을 동시에 품고 있다. 특히 그의 피아노 4중주들은 젊은 시절의 정열과 성숙기의 내면 성찰을 모두 보여주는 작품으로, 연주자들의 필수 레퍼토리로 꼽힌다. 음반에 참여한 연주자들의 조합이 대단하다. 크리스티안 테츨라프(바이올린), 바바라 분트로크(비올라), 타냐 테츨라프(첼로)까지. 테츨라프 남매와 포크트는 오랜 시간 쌓아온 탄탄한 호흡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으며, 분트로크는 지적이면서도 따뜻한 음색을 지닌 비올리스트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라르스 포크트의 섬세하고 따뜻한 피아노가 더해져, 브람스의 복합적이고도 깊은 세계를 효과적으로 전달해 준다.


”바이올리니스트로 살면서 베토벤, 브람스의 사중주를 연주해보지 못한다면 정말 슬픈 인생이 될 것입니다.”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먼저 피아노 4중주 2번 A장조는 1861년에 완성된 작품으로, 브람스의 중기 시기에 해당한다. 브람스는 슈만 가족에게 많은 도움과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이 작품을 완성한 뒤에도 클라라 슈만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었다. 클라라 슈만은 브람스에게 최고의 음악적 동료이자 평생의 친구였고, 그녀의 의견은 브람스에게 언제나 중요했다. 이 작품은 전체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연주 시간은 거의 교향곡에 버금갈 정도로 길다. 1악장의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 2악장의 서정적인 스케르초, 3악장의 깊은 서정미를 지닌 아다지오, 4악장의 민속적 정취가 담긴 론도는 각각 독립적인 개성을 지니면서도, 하나의 유기적인 흐름을 만들어낸다. 브람스 특유의 넓은 프레이징과 자연을 응시하는 듯한 평온함이 작품 전체를 감싼다. 또한 브람스 특유의 은은한 정서가 촘촘히 배어 있다. 분명 브람스는 스스로의 음악 언어를 완성해 가던 중요한 시점에 있었다. 라르스 포크트의 숨결을 담은 듯한 피아노 터치는 브람스 음악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으며, 현악기들의 생동감 넘치는 연주가 더해지면서 음악은 풍성하게 넘실거린다.



피아노 4중주 3번 c단조는 브람스의 실내악 중에서도 가장 내면적이고 비극적인 성격을 지닌 작품이다. 초고는 1855년경, 슈만이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쓰였다고 한다. 이 시기 브람스는 슈만에게도, 클라라에게도,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감정을 안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곡의 최종본은 무려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1875년에야 완성되었다. 젊은 시절의 요동치던 감정이 충분히 성숙한 작곡가의 통찰로 다시 태어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브람스 자신은 이 곡에 대해 “베토벤의 비창 소나타에 필적할 만한 비극성을 지녔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실제로 1악장의 긴장감 넘치는 전개, 2악장의 쓸쓸한 스케르초, 3악장의 절절한 아다지오, 그리고 4악장의 결연하면서도 끝없이 아래로 하강하는 듯한 마무리는 듣는 이를 강하게 끌어당긴다. 특히 3악장 도입부의 첼로 선율은 진흙 속에서 핀 연꽃처럼 아름답다. 클라라를 향한 브람스의 마음을 가늠해보고 싶다면 이 음악을 추천하고 싶다. 연주자들은 전반적으로 고통과 절망을 억누른 듯한 절제된 표현을 보여준다. 라르스 포크트는 특히 밖으로 표출되는 감정보다는 꾹꾹 눌러 담은 슬픔을 전하며, 테츨라프 남매와 분트로크는 굵고 탄탄한 선율로 어두운 감정을 층층이 쌓아 올린다. 브람스가 원했던 음악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녹음도 훌륭하다. 마치 연주 현장에 함께 있는 듯한 생생함을 느낄 수 있다. 각 악기의 세밀한 질감이 명료하게 살아 있으면서도, 전체 앙상블도 잘 들린다. 브람스 음악 특유의 입체적인 음향과 밀도 높은 하모니를 자연스럽게 구현해 내는 연주자들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음반은 브람스의 두 얼굴, 비교적 젊은 시절의 서정성과 성숙기의 비극성을 모두 진정성 있게 포착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브람스의 작품을 연주할 때, 어딘지 그와 연결된 느낌을 받았어요."
"이제는 브람스 음악을 포함한 중요한 음악들에 집중하고 싶어요."

-암 투병 중에 이루어진 라르스 포크트의 인터뷰 중

포크트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는 그의 연주로 증명된다. 포크트는 인생의 끝자락에서도 그에게 가장 애틋했던 브람스 작품들을 담담히 연주했다. 브람스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물론, 포크트의 음악을 기억하고 싶은 이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전하는 음반이다.


Essential Track | Piano Quartet No. 3 in C Minor, Op. 60: III. Andante

그야말로 브람스를 대표하고, 피아노 4중주를 대표하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순간이다. 가장 아름다운 첼로 선율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한다. 타냐 테츨라프의 연주로 시작해, 서서히 네 명의 연주자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흐름 속에서, 아름다움과 슬픔이 동시에 피어난다.

https://youtu.be/bD2-B3_9HA4?si=UmEndlkSSM2NTL36

글 안일구, 사진 김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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