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트네프 <그리그 피아노 작품집>
추운 손을 녹이는 난로같은 음악을 소개한다. 이 음반의 흐름은 독특하다. 대개 피아노 독주 음반은 가볍고 산뜻한 소품으로 시작해 점차 무게감을 더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이 음반은 정반대다. 무거운 소나타와 푸가로 문을 열고, 마지막에는 ‘서정 소품’의 밝고 소박한 세계로 흘러간다. 음악의 온도는 서서히 높아지고, 감정의 결은 점점 부드러워진다. 서늘한 공간에 놓인 난로처럼, 차가운 공기 속에서 그리그의 음악이 조용히 온기를 만든다.
재킷 사진도 흥미롭다. 피아니스트 ‘플레트네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무래도 얼음 같은 ‘차가움’이다. 음 하나하나에 칼 같은 절제가 느껴지고, 표정은 늘 무심하고 굳어 있다. 그런데 이 음반의 커버에 등장한 그는 지그시 웃고 있다. 억지웃음도, 의도된 연출도 아닌 듯한 자연스러운 미소다. 연주자가 바라보는 그리그의 음악이 사진에서도 느껴지는 듯하다.
사실 플레트네프와 그리그의 인연은 갑작스럽게 생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래전부터 서서히 다져온 관계에 가깝다. 그가 러시아 낭만주의, 특히 차이콥스키 레퍼토리로 주목받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리그는 그의 프로그램에 꾸준히 등장했다. 겉보기에는 차이콥스키의 서정성과 그리그의 민속성이 다르게 보이지만, 감정의 깊이나 멜랑콜리한 색채에서는 비슷한 결을 가진다. 플레트네프는 그 점을 일찍이 간파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리그는 그저 ‘북유럽 프로그램의 보충용’이 아니라, 연주자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는 작곡가로 자리 잡았다.
2000년에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발매한 이 음반은 그 선택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2025년 한국에서 열리는 리사이틀에서도 여전히 그리그는 플레트네프의 주요 레퍼토리로 포함되어 있다. 그리그는 노르웨이의 국민 작곡가지만, 독일에서 음악 교육을 받았다. 음악의 뼈대는 탄탄하고, 대위법적 구성에도 능숙하다. 그의 피아노 레퍼토리 역시 예상보다 방대하다. 그중에서 플레트네프는 이 음반에서 소나타, 푸가, 그리고 선택된 서정 소품을 소개한다.
음반의 가장 앞부분에 위치힌 ‘소나타’에서는 우울함이 특히 두드러진다. 플레트네프의 연주는 확실히 절제되어 있다. 과도한 루바토나 템포의 출렁임은 비교적 적다. 페달도 최소한으로 사용된다. 대신 전형적인 소나타답게, 명확한 음색과 밀도 있는 터치, 논리적인 구조와 음악 흐름이 강조된다. 녹음이지만 현장감도 잘 살아 있다. 많은 수정을 거치지 않은 듯한, 즉흥적인 느낌이 자연스럽게 음악 안에 스며 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곡은 푸가다. 그리그가 푸가를 썼다는 사실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리그의 이성적인 면모를 강하게 드러낸다. 플레트네프는 이 푸가를 무겁게 다루지 않는다. 바흐보다는 오히려 모차르트를 떠올리게 하는 정제된 투명함으로 곡을 풀어낸다. 대위법의 층이 섬세하게 쌓이고, 각 성부는 따로 또 같이 살아 움직인다. 플레트네프는 이 곡을 통해 그리그가 감정에만 치우친 작곡가가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서정 소품’은 어찌 보면 그리그의 음악적 역량이 가장 빛나는 작품이다. 나 역시 이 곡들을 자주 플레이리스트에 담아둔다. 짧지만 각인되는 멜로디, 화성으로 그려내는 풍경, 순간적인 정서의 깊이. 이런 요소들을 조화롭게 만들어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리그에게는 이런 것들이 쉽고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클래식 음악에서 ‘짧다’는 건 ‘가볍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그는 서정 소품을 통해 그 점을 분명히 증명한다. 플레트네프는 단 한순간의 터치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안다. 따뜻하고, 쓸쓸하고, 유쾌하고, 서글픈 감정들이 그의 음악 안에서 꿈틀거린다.
그리그의 음악은 들을수록 난로 같다. 거대한 열기는 아닐지 몰라도, 꼭 필요한 만큼의 온기를 정확히 전달한다. 불꽃은 작고 조용하지만 오래 지속된다. 특히 플레트네프의 해석은, 연주자가 ‘표현’하려 애쓴다는 인상보다, 그냥 자연스럽게 음악을 '놓아두는’ 쪽에 가깝다. 듣는 이는 오히려 그 안에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감정을 읽어낸다. 플레트네프는 난로 속 작은 불씨를 무심한 얼굴로 지켜보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 거리감이 오히려 더 깊은 몰입을 이끈다. 차가운 공간 속에서 따뜻함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그는 설명 없이 음악으로 보여준다. 이 조용한 북유럽 음악 여행은 그리그의 음악과 플레트네프의 손끝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음악이 듣는 이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린다. 기분좋은 여운이 길게 이어진다.
Essentioal Track | 21번 트랙 (Grieg: Lyric Pieces Book VI, Op. 57: I. Vanished Days (Entschwundene Tage))
‘사라진 날들’ 혹은 ‘지나가버린 날들’이라는 제목처럼, 이 곡은 회상과 그리움을 테마로 한다. 과거에 대한 아련한 감정은 거의 모든 작곡가가 다루는 주제이다. 플레트네프는 그리그의 음악을 빌려 이를 극도로 담담하고 절제된 방식으로 풀어낸다. 쓸쓸함이 스며든 느린 부분과 경쾌하고 밝은 빠른 부분이 교차하며 감정의 대비를 이루지만, 연주가 흐를수록 두 성격은 서서히 하나로 합쳐진다.
https://youtu.be/XvsmMAglkr4?si=mW3pq2g1NumOiE6E
글 안일구, 사진 김신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