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레베헤, 콜레기움 보칼레 헨트 <b단조 미사>
“음악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데 있다.”
(“Die wahre Aufgabe der Musik ist, zur Ehre Gottes und zur Recreation des Gemüths zu sein.”)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J.S. Bach)
바흐는 자신의 악보 마지막에 S.D.G.라는 말을 자주 적었다. 이는 Soli Deo Gloria의 약자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을 뜻한다. 바흐는 자신이 음악을 만드는 목적이 단지 개인적인 명예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께 바치는 찬양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음악을 완성할 때마다 “이건 내 능력으로 한 게 아니고, 신의 은총 덕분입니다”라는 고백을 악보에도 적어 놓은 것이다.
돌이켜보면 악기 연주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 15살 무렵부터 바흐의 음악은 꾸준히 연주해왔다. 20살이 넘어 독일에서 공부하던 시절엔 교회마다 여러 작곡가의 종교음악이 항상 연주되고 있었다. 나 또한 종종 아르바이트처럼 연주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특히 <마태수난곡>의 플루트 파트를 맡아서 연주한 일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직접 연주해보니 완전히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듯했다. 이렇게 깊고 아름다운 음악이 있다니. 단지 성경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모두가 가진 보편적인 것들을 건드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잘 모르겠지만 고통과 용서, 절망과 희망 같은 감정이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도 음악 속에는 질서가 있었고, 이성과 감성이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바흐의 음악에 대한 믿음은 꽤나 확실하다.
바흐가 남긴 종교 음악은 스펙트럼이 무척 넓다. 그중 단연 최고라 불리는 걸작 중에는 <마태수난곡>도 있지만 <b단조 미사>를 꼽을 수 있다. 나는 원래 <마태수난곡>을 더 좋아했지만, 요즘은 <b단조 미사>를 더 자주 듣는다. 깊은 고통과 슬픔이 느껴지는 <마태수난곡>도 좋지만, <b단조 미사>를 들으면 마음이 밝고 맑아진다. 이 곡은 들으면 들을수록 매력이 깊어지는 작품이다. 말 그대로 '들매'다. 우선 제목을 보면 조성을 뜻하는 ‘b단조’를 빼면 그냥 ‘미사’다. 왜 바흐는 미사곡을 썼을까? 그가 일했던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는 루터교 전통을 따랐다. 그래서 바흐의 종교 작품 대부분은 미사곡이 아닌 루터교 예배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b단조 미사>는 라틴어 가톨릭 미사 전체를 다루는 곡이다. 그렇다고 이 곡이 가톨릭 예배를 위해 쓰이는 것도 아니다. 아마도 바흐는 그저 보편적인 형식을 통해 자신의 음악을 가장 넓고 깊게 펼쳐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또 하나의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그는 이 작품을 드레스덴 궁정의 가톨릭 귀족에게 헌정했고, 이때 자신의 작곡 능력을 적극적으로 알리고자 했다.
결론적으로 <b단조 미사> 안에는 바흐가 평생 쌓아온 음악언어가 골고루 녹아있다. 마치 오페라처럼 드라마틱한 순간도 있고, 치밀한 대위법과 풍부한 감정 표현이 쏟아져 나올 때도 있다. 거대한 음악 세계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라틴 미사의 다섯 항목(Kyrie, Gloria, Credo, Sanctus, Agnus Dei)으로 나뉘며, 총 27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누구라도 27개의 악장을 한 번에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이런 작품일수록 처음에는 전체를 들으려 하기 보다 몇몇 음악들을 조각으로 들어보길 추천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언젠가 교회나 공연장에서 이 전곡을 한 자리에서 듣게 된다면, 그것은 아마 인생 최고의 음악 경험이 될 것이다. 아래에 소개할 다섯 곡은 그 첫걸음이 되어줄 만한 음악들이다.
Kyrie eleison (Coro) – 라이브로 한 번 들은 이후 그 전율이 잊혀지지 않는 곡이다. 시작을 여는 이 합창곡은 어둡고 중후한 분위기 속에 바흐 특유의 정교함이 살아 있는 명곡이다. 가사를 보면 세상의 죄를 짊어진 존재가 간절히 자비를 구하는 순간을 노래한다. 단연 최고의 트랙이고, 작품 전체의 성격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Qui tollis peccata mundi (Coro) –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여"라는 텍스트가 계속 반복된다. 깊은 슬픔과 간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곡이다. 현악기의 부드러운 반주 위에 합창이 조심스레 펼쳐지고, 두 대의 플루트가 대화를 주고 받는다. 강렬한 임팩트 없이도 감정 표현은 충분하게 표현된다.
Et incarnatus est (Coro) –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사람이 되는 신비로운 순간을 묘사한다. 이 합창곡에는 경건함과 신비함이 절묘하게 녹아들어 있다. 속삭이는 듯 시작해 점차 고양되는 흐름 속에서, 바흐는 모든 것을 극도로 절제한 채 음악을 풀어낸다.
Crucifixus (Coro) –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땅에 잠드셨으며"라는 가사를 표현하는 악장이다. 툭툭 점을 찍듯 반복되는 베이스의 저음 진행 위에 4성부 음성이 교차한다. 장송 행진처럼 무겁고 운명적인 흐름 속에서 고난과 죽음의 이미지가 강하게 떠오르게 한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음악으로 형상화한 수많은 곡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곡이다.
Agnus Dei (Alto solo) – 이 작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알토 독창곡으로, 요즘은 카운터테너가 자주 부른다. 이 음반에서는 전설적인 카운터테너 안드레아스 숄이 부르고 있다. 현악기가 머뭇거리며 등장하고 뒤이어 "하나님의 어린 양이여, 우리에게 자비를 주소서"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극도로 단순한 선율 속에 담긴 한없이 깊은 정서다. 작품 전체를 마무리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곡이 있을까? 이 곡은 종종 연주회에서 따로 연주되며, 많은 청중에게 긴 여운을 남긴다.
<b단조 미사>는 사실 이 5개의 곡 말고도 모든 곡이 하이라이트라 부를 만하다. 전 세계 수많은 교회나 성당에서는 물론 <b단조 미사>는 연주회용 작품으로 자주 연주된다. 대부분은 전문 합창단과 바흐 전문 연주단체, 또는 고음악 연주자들이 정기적으로 무대에 올린다. 물론 성탄절이나 부활절 같은 특별한 시기에는 집중적으로 공연되기도 한다. 종교적 텍스트를 갖고 있지만, 지금은 바흐의 예술성과 인간적인 고백을 느낄 수 있는‘인류 전체의 유산’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런 작품을 음반으로 다양하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수많은 명연 중에서도 결국 내 마음속에 자리잡은 음반은 필립 헤레베헤가 1998년 콜레기움 보칼레 헨트와 함께 녹음한 버전이었다. 헤레베헤는 이 작품을 무려 세 차례나 녹음했는데, 그만큼 <b단조 미사>에 대한 애정이 깊은 것 같다. 1998년의 녹음은 세 번의 녹음중 중간에 위치해 있으며, 모든 것이 조화롭게 느껴지는 명연이다.
이 녹음에서의 합창은 명료하면서도 따뜻하고, 성악 솔리스트들의 해석 역시 인위적인 감정을 배제한 채 음악 그 자체에 집중되어 있다. 개별 악기나 성악, 합창이 또렷하게 부각되기를 바라는 이라면 다소 아쉽게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음반의 진가는 전체가 만들어내는 조화로운 음색과, 전반에 깔린 특별한 분위기에서 드러난다. 마치 모두가 음악으로 기도하는 느낌이다. 헤레베헤는 수많은 디테일을 통해 이 분위기를 정교하게 완성해낸다. 어쩌면 바흐가 말했던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음악의 본질에 가장 근접한 해석일지도 모른다.
<b단조 미사>를 처음 접하는 이라면 이 음반으로 시작하길 권하고 싶다. 처음에는 인상적인 악장들을 하나씩 감상하다가, 마음과 시간이 허락되는 날 전체를 따라가보자. 바흐의 음악이 마음에 ‘탁’ 하고 와닿는 순간이 분명히 찾아올 것이다.
Essential Track | 26번 트랙 (Mass in B Minor, BWV 232: 26. Agnus Dei)
안드레아스 숄이 부르는 ‘Agnus Dei’를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음이 힘들 때 들으면 효과가 정말 좋다. 전통적인 ‘Agnus Dei’는 아래의 가사를 세 번 반복하지만, 바흐는 두 번만 노래하게 한 뒤, 가사를 ‘평화를 주소서(Dona nobis pacem)’로 바꾸고, 이를 확신에 찬 합창으로 마무리한다. 이 합창은 27번 트랙으로 분리되어 있다. ‘자비를 주소서, 자비를 주소서, 그리고 평화를 주소서’로 이어지는 흐름은 <b단조 미사> 전체의 구조를 돋보이게 만드는 완벽한 마무리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여,
우리에게 자비를 주소서.
Agnus Dei, qui tollis peccata mundi,
miserere nobis.
https://youtu.be/KJ4JqXkEtoQ?si=au56DDpIiiZEjoft
글 안일구, 사진 김신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