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겡,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교향곡 2, 3, 죽음의 섬>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나의 오케스트라’다.”
-라흐마니노프-
라흐마니노프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그야말로 뗄 수 없는 사이였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라흐마니노프는 이 오케스트라를 “나의 오케스트라”라 부르며 남다른 애정을 표현했다. 이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교향곡 제3번, <교향적 무곡> 같은 말년의 대표작들이 모두 필라델피아에서 초연되었다. 또한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며 함께 녹음한 작품들도 여럿이다. 당시 지휘는 스토코프스키나 오먼디가 맡았고, RCA Victor 레이블을 통해 나온 이 녹음들은 지금도 전설이다.
아마 라흐마니노프에게 영향을 준 건 그들의 ‘사운드’였을 것이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유려하고 따뜻한 현악 사운드로 유명했다. 라흐마니노프는 작곡할 때도, 이 소리를 염두에 두고 악보를 다듬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곧 라흐마니노프의 음악 언어 중 일부였던 것이다. 필라델피아의 라흐마니노프를 놓칠 수 없는 이유다. 최근 야닉 네제 세겡은 이 전통을 오늘날의 감각으로 다시 꺼내놓았다. 그저 명곡을 잘 연주하는 게 아니라, 라흐마니노프라는 음악가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사이의 정서와 기억을 다시 살아나게 하는 작업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이 음반은 어떻게든 특별할 수밖에 없다.
야닉 네제 세겡은 2012년부터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10년이 넘도록 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를 지휘자로서 평가할 때, 그리고 이 음반에 대해서도 평론가들의 평가는 호불호가 항상 갈리고 있다. 그러나 평론가들 보다 나는 필라델피아 단원들의 결정을 믿고 존중한다. 그들은 세겡의 어떤 점을 좋아하는 것일까? 젊고 에너지 넘치는 지휘자라는 것은 음악을 들어도, 지휘하는 모습을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그 이상의 어떤 점이 단원들과 필라델피아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이들은 라흐마니노프가 남긴 모든 주요 관현악 작품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했다. 교향곡 1번부터 3번, <죽음의 섬>, <교향적 무곡>은 물론,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와 함께 피아노 협주곡 전곡과 <파가니니 랩소디>까지 완성했다. 한 작품도 빠짐없이 담긴 이 프로젝트는, 20세기 초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함께했던 바로 그 오케스트라가 21세기에 내어놓은 선물이다.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전통과 감성, 그리고 기억들이 다시 소리로 울리고 있다. 필라델피아가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는 사운드를(그게 정확히 무엇이든) 이 음반에서 분명 들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교향곡 제2번과 제3번은 이들의 호흡이 가장 생생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시작부부터 깊이와 에너지를 실어주는 네제 세겡의 터치가 인상적이다. 선율은 전반적으로 방향성을 갖고 유려하게 흐른다. 풍부하면서도 구조적으로는 단단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3악장 아다지오의 감동. 클라리넷 주자의 활약속에서 현악기들이 수평으로 넓게 흐르면서 감동을 전한다. 클라이맥스 하나를 향해 달려가기 보다는 매 순간을 즐기며 이어지는 연주다. 과하게 감정을 토해내지 않아서 아쉬울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이런 스타일도 참 좋다. 작품 전체의 모든 순간을 즐기게 해주는 연주다.
제3번은 그보다 더 대담하다. 빠르고 생동감 넘치는 템포, 등장했다가 금방 사라지고 또 다시 갑작스레 폭발하는 금관의 에너지, 민첩한 현악의 리듬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많은 지휘자들이 이 곡의 변덕스러운 성격을 다루기 어려워했지만, 네제 세겡은 정확히 그 점에서 탁월한 모습을 보인다. 악상의 널뛰기나 질감의 변화들을 전혀 어색하지 않게 다룬다. 이런 점을 들어서 Gramophone에서는 이 연주가 앙드레 프레빈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전설적인 LSO 음반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평하기도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네제 세겡과 필라델피아의 음반이 더 좋다. 매력이 넘치면서도 굉장히 친절하다. 교향곡 3번을 어려워 했던 분들에게 특히 추천하고 싶다.
내가 이 음반을 처음 듣게 된 이유는 마지막 곡 덕분이다. <죽음의 섬>(Isle of the Dead). 이 무시무시한 제목의 곡은 라흐마니노프의 내면이 모두 담긴 걸작이다. 스위스의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Arnold Böcklin)이 그린 같은 이름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되었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그림의 흑백 복제본을 보고 강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림에는 조용한 물 위로 하얀 배 한 척이 섬을 향해 나아가고, 그 배에는 관이 실려 있다. 섬은 마치 거대한 '무언가'처럼 보이고, 고요함과 죽음의 기운이 감돈다.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신비롭고 몽환적이다. 라흐마니노프는 1909년, 미국 투어를 앞두고 짧은 시간 안에 이 곡을 완성했다. 작품 전체는 5/8 박자 특유의 ‘흘러가는 듯한’ 리듬 위에 소리들이 쌓이는 형태다. 어찌보면 죽음을 주제로 삼았지만, 음악은 내면을 고요하게 바라보는 느낌을 준다. 라흐마니노프가 그린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고요한 세계인 것 같다. 듣다 보면, 그 섬에 음악과 함께 도착해 있는 기분이 든다. 묘한 곡이다.
라흐마니노프를 흔히 20세기의 낭만주의자라고 부른다. 온갖 현대적인 실험이 난무하던 시대에서 그는 낭만성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19세기의 낭만성과는 다르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한편으로는 낯선 현대적 감각을 지니고 있다. 이 지점에서 라흐마니노프 작품의 마력이 뿜어져 나온다. 선율은 마음을 휘감고, 화성은 풍부하지만, 리듬과 구조는 은근히 까다롭고, 때때로 불안정하다. 특히 교향곡 3번과 같은 후기 작품에서는 그 이중성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감성적인데 예측 불허하고, 익숙한듯 낯설다. 만약 교향곡 2번의 아름다움에 이미 익숙해졌다면, 이제는 3번으로 넘어가 볼 때다. 라흐마니노프가 진짜로 흥미로워질 것이다.
네제 세겡의 해석도 마찬가지다. 그는 과거만을 따르지 않는다. 물론 전통을 존중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지금 이 시대의 감각이 가득하다. 라흐마니노프가 즐겨 사용했던 포르타멘토와 같은 연주지시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며, 다양한 감정표현을 정교하게 조율해 나가고 있다. 그 결과, 음악의 큰 흐름과 서사가 또렷하게 드러난다. 지휘자의 능력이 확실히 돋보이는 순간들이다. 찰나의 아름다움을 빠짐없이 포착하면서도 전체 구조를 흐트러뜨리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가 왜 젊은 나이에도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지 이해가 간다. 그리고 이 모든 해석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있기에 가능하다. 오케스트라는 놀라울 만큼 협조적이다. 각 파트는 저마다의 음색과 개성을 충분히 살리면서도, 지휘자의 요구에 민첩하게 반응하고 있다. 과거를 품되, 현재를 살아내는 감각. 네제 세겡과 필라델피아는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에 또 한 번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Essential Track | 10번트랙 (Isle of the Dead, Op. 29)
조용히 흐르는 5/8 리듬 위로, 어딘가로 떠나는 배 한 척이 떠오른다. 음울하면서도 몽환적인 울림,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듯한 섬. 모든 것이 고요한데, 마음은 깊이 뒤흔들린다. 유려한 프레이징과 풍부한 현악 사운드가 인상적이다. 이 곡이 음반의 마지막에 놓인 이유를 알 것 같다. 라흐마니노프라는 사람의 내면을, 음악 그 자체로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곡이다.
https://youtu.be/nTLfe2SJvW4?si=rHy9sN3ropoxMwsg
글 안일구, 사진 김신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