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만의 고통과 그리움

마리아 조앙 피레스 <슈만: 빈 사육제 등>

by 안일구
Deutsche Grammophon, 1994

슈만의 음악에서 항상 느껴지는 두 감정이 있다. 하나는 고통, 하나는 그리움이다. 이 음반 역시 그렇다. 고통은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음악 뒤에 살짝 숨겨져 있다. 길을 잃은 선율과 음과 음 사이의 여백에는 그리움이 가득하다. 슈만은 피아니스트 마리아 조앙 피레스는 꼭 권하고 싶은 조합이다. 피레스의 연주에서는 두 감정이 뚜렷하게 드러나지만, 다행히 너무 무겁게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곡의 자연스러운 호흡 속에 스며 있어, 듣는 사람이 자기 속도로 그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그녀의 슈만은 오래 들어도 지치지 않는다.


이 음반은 피레스가 슈만의 대표적인 성격 소품들을 한 자리에 담은 기록이다. ‘숲의 정경’, ‘아라베스크’, ‘3개의 로망스’, 그리고 '빈 사육제'가 수록돼 있다. 선곡만 봐도 흥미롭다. 서정과 환상, 명료함과 유머가 교차한다. 피레스는 한 가지 분위기에 머물지 않고, 슈만의 여러 얼굴을 고르게 보여준다. 슈만에 관심이 있는 입문자에게도 애호가에게도 고마운 음악들이다.


‘숲의 정경 op. 82’은 제목처럼 자연과 연결된 작품이지만, 자연을 묘사하는 음악이라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숲 속의 정적, 그 안에서의 작은 움직임과 그걸 바라보는 감정의 흐름을 그린다. 피레스는 여기에 불필요한 색을 입히지 않는다. 소리들이 소박하고 맑다. 느린 부분도 그렇지만, 빠른 악장에서도 손끝이 건반 위에서 아주 가볍게 움직인다. ‘Jäger auf der Lauer’(숨어있는 사냥꾼) 같은 곡에서는 긴장감을, ‘Vogel als Prophet’(예언하는 새)에서는 몸이 붕 뜨는 시간을 만들어낸다. ‘고독한 꽃(Einsame Blumen)과 같은 곡을 연주할 때, 피레스의 터치는 보물과 같다. 슈만의 곡도, 피레스의 연주도, 숲 속에서 느끼는 심리의 변화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아라베스크 op. 18’는 슈만의 초기 작품으로, 간결하고 단순한 구조의 네 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주자가 어떻게 균형을 잡느냐에 따라 인상이 크게 달라지는 작품이다. 피레스는 각 반복에서 색채를 조금씩 바꿔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다. 다이내믹 변화와 루바토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특히 마지막 곡인 ‘Zum Schluss(마지막에)’는 1분 30초 남짓한 길이지만, 아라베스크의 하이라이트다. 단순한 선율이 조용히 내려앉고, 피레스는 음량을 줄이며 투명하게 소리를 빚는다. 빛이 서서히 사라지는 듯한 순간이다. 담담한 연주지만 여운이 길게 남는다.


’3개의 로망스 Op. 28‘의 세 곡은 Sehr markiert(매우 분명하게), Einfach(단순하게), Sehr markiert(매우 분명하게)의 배열로 이루어져 있다. 1곡은 악센트를 세게 치거나 터치를 과도하게 부각하기보다, 감정이 움직이는 모먼트들을 조용히 짚어주는 연주다. 2곡에서는 극도로 단순하고 깨끗한 선율이 나타난다. 숨을 고르듯 천천히, 꾸밈없이 흐른다. 슈만이 남긴 Einfach라는 지시를 소리로 그대로 구현한다. 3곡은 초반에 리듬을 살려 무언가 결심한 듯 힘 있게 나아가지만, 곧 부드럽게 가라앉는다. 중간에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몰아치지만 결국 다시 차분하게 곡이 마무리된다.



"<빈 사육제 Op. 26>의 '간주곡 Intermezzo', 그 전율. 음악가는 그 대목에서 듣는 이들이 얼마나 죽고 싶어 할지 말랐단 말인가?" 하지만 상대는 가면을 벗고, 얼굴을 드러낸 채 말이 없다.
-미셸 슈나이더, <슈만, 영혼의 풍경> 중


‘빈 사육제 op. 26’는 슈만이 1839년 비엔나에서 작곡한 다섯 악장의 피아노 작품이다. 수많은 슈만 애호가들이 특별하게 여기는 작품이다. 1악장 Allegro는 소나타 형식으로, 활달한 주제와 대조적인 부주제가 교차하며 전개되고, 중간부에는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 선율이 변형되어 왈츠 리듬 속에 잠시 등장한다. 3악장 ‘Scherzino’와 5악장 ‘Finale’는 빠른 템포와 명확한 리듬으로 윤곽이 뚜렷하며, 그 사이에 놓인 2악장 ‘Romanze’와 4악장 ‘Intermezzo’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전환한다. 2악장은 간결한 2부 형식의 서정적인 곡으로 깊은 여운을 남기고, 4악장은 쏟아지는 음들 속에서 고통과 그리움이 함께 묻어난다. 피레스의 연주는 1, 3, 5악장에서 구조와 리듬을 또렷하게 제시하고, 2악장에서는 맑은 선율로 감정을 깊게 전하며, 4악장에서는 긴 호흡과 여백으로 내성적인 색채를 강조한다. 축제의 열기와 그 이면의 다양한 감정을 한 작품 안에서 모두 만날 수 있다.


피레스의 슈만은 자연스럽다. 복잡한 장면 전환이나 낙차가 줄어들어 음악이 매끄럽게 이어진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감정의 밀도는 높다는 것. 특히 슈만을 대표하는 두 감정, '고통'과 '그리움'이 피레스의 연주에서 선명하다. 연주라기 보다는 공감의 태도로 조용히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듯하다. 정확히 어떤 감각인지 언어로 다 설명기는 어렵지만, 편안함과 깊이가 동시에 존재하는 이 모순 같은 조합이야말로 피레스가 슈만을 연주할 때만 만들어내는 특별한 순간일 것이다.


Essential Track | 18번 트랙 Schumann: Faschingsschwank aus Wien, Op. 26: II. Romanze (Piuttosto lento)

당김음 '레'가 또렷하게 울리며 곡을 시작한다. 단순한 선율이 차분히 흐르고, 화성도 단순하다. 마치 붐비는 축제 속에서 살짝 비켜나 혼자서 조용히 숨을 고르는 순간 같다. 이 음악은 짧지만 작품 전체에서 가장 진솔한 장면이다.

https://youtu.be/RH_OsvuGIQc?si=5lAZz6U4FQu1xjY5

글 안일구, 사진 김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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