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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Mar 26. 2019

불가(不可)함이 조명하는 가능(可能)함

김연수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들어가며


   김연수는 스스로를 거짓말쟁이라 말한다. 그는 ‘나’의 존재가 무성한 시선에서 바라본 세상에서 진실의 농도는 한없이 옅어졌음을 자인하며 갈망과 허망 사이를 헤집는다. 많은 이야기를 소설이란 매개 안에 담아내고 싶어 하면서도 언제나 거짓말이 스스로의 삶에 쌓이며 헛헛함을 남기고 있다는 그에게 본질적인 물음이 생긴다. 왜 자신의 시선을 거짓의 총체로 귀결시켰고, 일련의 거짓 속에서도 끝까지 찾고 쓰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이 물음을 지닌 채 작품을 바라보면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속 단편들은 모두 ‘상세한 기술’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지난 시간 속 배경의 정서와 스쳐지나간 사람의 살갗과 숨결을 아우르며 기억을 더듬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의 도입부부터 “한 편린의 진실도 찾을 수 없다”며 죽음을 앞두고 한 열사의 지난 항거를 되짚는 「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까지 매 순간의 서술은 조밀하면서도 개괄적이다.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기엔 너무나 상세하고 정성스럽기에 잠시 의아스럽지만 분명 김연수는 모든 것을 거짓이라 천명하고 있다. 한 인간의 시선이 담아내는 세상을 진실로 일원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의 거짓말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작품은 단연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키워드는 ‘추정’이다. 소설 서두에 제시된 “122행의 앞 세 글자는 빠져 있다. 빠진 글자를 순서대로 추정하자면, 121행의 마지막 글자 포(蒲)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구절은 우연한 결과물이 아니다. 세월의 흔적이 지워버린 왕오천축국전, 죽음으로 소멸된 여자친구의 존재, 그리고 이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그’의 모습까지 적확한 것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간의 맥락을 파악하며 내리는 추정은 가장 합리적인 거짓말일 따름이다.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부유하는 가운데 이 글은 그의 소설이 거짓말임을 수용하고자 한다. 다만 김연수의 거짓말이 의도된 것이 아닌, 이야기를 함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대두되는 불가항력임을 인지한 채 진실을 말하는 것의 불가함이 탐색하고 조명하는 새로운 의미와 가능성 역시 궁구해보고자 한다.

    

Ⅰ. 소설 속 인간사 이해의 필연적인 한계와 그로부터의 탈피

   

    김연수라는 작가는 한계를 안다. 인간이기에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인지(認知)의 한계 아래 그는 온전한 이해란 존재하지 않는 개념임을 역설한다. 소설의 제목이 이를 방증한다. 작가는 모름지기 소설의 현신(現身)이자 재현이다. 그런 존재를 김연수는 유령이라 지칭하며 적확한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무형의 유령처럼 작가 역시 완전한 창작자가 될 수 없음을 시인한다. 심지어 종이 위에 이기할 수 있는 사고의 흔적인 문자조차 불완전하다. 불교에서 강조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처럼 진리는 문자로 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김연수는 역사를 제시하며 나름의 당위를 설정한다. 실로 역사를 안다는 것은 기록된 것을 기억하는 행위이다. 기록한다는 것은 동시다발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에 우월성을 씌우는 선택적 행위이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그저 추측될 따름이다. 진위는 이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소멸되어 인지의 단계를 벗어났다. 그렇기에 작위적인 인과성을 바탕으로 기록된 역사가 필연의 결과물이자 진리라고 판단하는 것은 무용에 지나지 않는다. 김연수는 그렇게 ‘앎’의 허무함을 등장시킨다. 과거를 지나온 진실은 온전하게 확인할 길이 없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속 이야기처럼 김옥균이 관찰했던 지구의가 박지원의 것인지 박규수의 것인지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여지는 없다. 우리는 그저 기록된 역사를 조망하며 진리 아닌 진리와 사실을 이해했다고 자위할 따름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인간의 사유란 한계가 명확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성이란 합리적 매개에 기대어 나름의 판단을 내리고 진실이라 명명하는지도 모른다.


   소설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역시 불가능한 이해를 향해 지속되는 사유를 담아내고 있다. ‘그’가 알고 싶은 여자친구는 이미 죽었다. 야만의 시대에서 회색인이나 방관자로 살아가기 싫었다는 그녀의 죽음 이면에 존재하는 진의란 분명하면서도 모호한 것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의미를 받아들인다면 명확하겠지만 유서 그 어디에도 ‘그’의 흔적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에게 무한한 물음표를 남긴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그’는 이면의 뜻을 궁구하는 방향을 택하고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예기치 않게 인과라는 요소에 함몰되어 독립할 수 없는 사고의 한계를 마주하고 여자친구의 본질이 지워지고 있음을 인지한다. “그와 여자친구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오직 그 마지막 순간, 그러니까 여자친구의 투신에 논리적으로 부합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문장으로 남길 것이냐, 그러지 않을 것이냐가 결정됐다”(118면)는 ‘그’의 말처럼 작위적으로 조성되는 문장들은 지난 삶의 중요한 본질을 지워가며 이해의 궤에서 탈피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렇게 낙심한 ‘그’는 여자친구가 삶의 마지막에서 마주했을 왕오천축국전으로 향한다. 하지만 이를 이해하는 행위도 온전치 못한 흔적을 어림잡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해를 둘러싼 주체와 대상의 시공간적 존재성이 다름에서 오는 불가항력적인 엇갈림인 셈이다. 다시 말해 ‘그’가 다다르고 싶은 이해의 종점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문자로 표상된 흔적이 본질의 섬세한 결을 담아내지 못하는 한계가 있는 한 이해는 언제나 미완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남은 최선은 어쩌면 그의 말처럼 “세상에는 아무리 모든 것을 총동원해도 이뤄질 수 없는 꿈이 있다는 걸 납득”(112면)하는 것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알고자 노력한다. 끝없는 사유를 담아놓은 소설을 왕오천축국전의 전문가인 ‘나’에게 보낸 것도 합리적인 당위성을 부여받아 이해의 종점에 다다르고자 하는 ‘그’의 간절함이 배어있는 결정이다. 하지만 주인공인 ‘나’ 역시도 훼손된 왕오천축국전에 주석을 달며 가닿을 수 없는 의미의 본질 주변을 맴도는 인물이다. 원서도 아닌, 227행에 불과한 두루마리를 바탕으로 왕오천축국전이라는 고서를 정확히 개괄한다는 것은 이미 한계가 자명한 도전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에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이해가 아닌 오해로 점철된 치기어린 ‘그’의 생각에 ‘나’는 사랑의 감정을 동반한 강렬한 끌림을 느낀다. 도달 불가능한 영역에 완전한 이해가 있을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이 ‘나’에게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행동이 과연 실없이 무의미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소설은 오히려 불가능함을 지속하는 ‘그’를 통해 통상적인 관념에 역전을 가한다. ‘안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알아간다’는 것을 못할 이유는 없다. 김연수는 그것이 한계가 자명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임을 말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음’을 직시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이다. 포기하거나 그럼에도 해보거나. ‘그’는 그럼에도 해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원본이 없는 상태에선 의미가 더해진 무엇도 원본일 수 없지만 동시에 그 자체로 원본일 수 있다는 ‘나’의 말마따나 ‘그’는 자신만의 의미를 더해가며 이해의 원천을 궁구하고자 나섰다.


  사실 ‘그’는 여자친구가 남긴 유서를 바라보며 납득할 수밖에 없음을 인지했다. “그는 거대한 틈 사이에 많은 의미가 숨어 있다는 것”(137면)을 알았지만 유서 속 문장 사이의 틈을 남겨두고 살아가야함을 인정할 따름이었다. ‘그’는 존칭과 비칭 사이의 간극에 존재하는 광활한 사고의 여백을 너절한 문자 따위로 채워 넣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동시에 부질없이 백지 위를 공명하는 글자들은 결코 그녀에게 닿을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알아가고자 했다. 왕오천축국전 속 공간인 낭가파르바트에 혹시나 미지의 영역이 존재할까 일말의 희망을 품은 채 ‘그’는 설산에 오른다. 이런 집념은 낭가파르바트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조차 조밀하게 작성된 등반일지에 오롯이 담겨있다. 과중한 임무와 육체를 에는 고통 속에서도 ‘그’는 분명치 않은 문장을 상기했지만 어디까지나 그릇된 접근이었다. 꿰어지지 않은 구슬마냥 생각들은 파편화되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일지의 마지막 문장인 ‘다시 한 달을 넘어 설산에 오르면’은 이처럼 매듭지어지지 않은 미완의 사고를 대변한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조차 여자친구를 알고 싶어 했던 ‘그’의 갈망은 결국 온점을 찍지 못한 채 남은 것이다.


   하지만 진리 혹은 진실이라는 것은 닿을 수 없는 무형의 이상향이기에 일지 속 ‘그’의 마무리는 도리어 자연스럽다. 그리고 등반일지가 ‘나’에게로 와서 가장 걸맞은 상상이 덧붙여졌을 때 ‘그’는 더욱 특별해졌다. 보편적인 상상이 아닌 ‘나’만의 상상이 ‘그’의 발자취를 빛나게 만들어준다. 소설 속에서 ‘나’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하다. 역사적 사료에 주석을 다는 일을 업으로 삼는 ‘나’ 역시 한계를 인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주석 달기란 결국 다수의 인정을 담보로 한 해석을 이기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나’의 말처럼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미지의 진리 중 일부를 인간의 이해 담론 위에 얹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보편적인 사고 하에서 특별하고도 일원화된 진리를 찾기는 어렵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나’이기에 진실을 찾고자 설산으로 향한 ‘그’에게 선사한 상상의 마무리는 실로 의의가 깊다. ‘나’는 온전하게 이해가 충족된 궁극의 니르바나를 그려 더 이상 현존하지 않는 ‘그’의 생각에 ‘가능함’을 심어준다. 이해하고 깨우치고자 설산에 오른 ‘그’임을 알기에 ‘나’는 현실에서의 한계 영역을 탈피해 사멸한 존재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부여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생사의 영역을 넘어서서 불가능해보였던 ‘진리 탐색’ 역시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투영시키는 차원에서 말이다.

  

Ⅱ. 단계 분할을 통해 바라본 삶의 주체적 존립 가능성


   김연수는 이 소설을 통해 크게 3단계로 삶이란 체계에 접근하고 있다. 첫 번째는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인지하는 단계, 두 번째는 ‘다양한 시점에서 삶을 조망하는 것’을 시도하는 단계, 마지막 세 번째는 ‘확신을 배제하고 의미를 가미하는’ 단계이다.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속 인물들은 이 3단계를 거치면서 적확한 결론 내리기에서 벗어나 열린 결말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지금부터 단계적 특성에 기인해 ‘진리 없음’이란 진리를 마주한 후 어떤 과정을 통해 새로운 삶의 양상으로 나아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새로운 삶이 나름의 의미를 지닌 채 객관성과 보편성의 굴레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존립할 수 있는지의 여부 역시 가늠하고자 한다.


① 김연수 소설의 1단계: 이해불가함의 인지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에서 세영은 네즈미가 단언컨대 세희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아무리 부부라는 친밀의 틀에 서로를 맞추고 살아가지만 어디까지나 이해의 교집합은 한계가 뚜렷하다는 것이다. 이해하는 척의 연속인 일상에서 서로를 기만하며 삶을 허비하고 있다는 그녀의 말처럼 인간의 심연에 존재하는 ‘어두운 구멍’은 이해의 영역과는 무관하다. 그녀의 말은 그냥 존재할 따름인 차원에 이해했다는 단정을 씌우는 것이 이기적인 자위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방증한다. “과거란 자신에게 유리한 몇 개의 증거만 현장에 남겨두고 도주한 범인과 비슷하다”(34면)는 말처럼 지난 기억을 반추하며 진실을 궁구한다는 것은 철저하게 자의적인 선별에 의해 엄선된 선택지 중에 정답의 존재를 확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해의 본질은 입을 다문 채 기억 저편에 머물고 있다.


   「뿌넝숴」 역시 진실한 역사는 기록된 이야기로 전해지는 것이 아님을 역설하고 있다. “뿌넝숴. 뿌넝숴. 역사라는 건 책이나 기념비에 기록되는 게 아니야.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몸에 기록되는 거야. 그것만이 진짜야. 떨리는 몸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말해주는 게 바로 역사야. 이 손, 오른손 검지와 중지가 잘려나간 이 손이 진짜 역사인 거야”(66면)라고 말하는 노인은 누군가의 시각이 직조한 역사를 믿지 않는다. 책에 담긴 사건은 개인을 담지 못하고 있다. 진실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초점이 맞춰져있기 때문이다. 노인은 그런 ‘책의 역사’를 부정한다. 소설 전반에 걸쳐 노인에 의해 상세하게 서술되는 당시의 상황은 날짜와 장소, 시간만으로 점철된 책 속의 역사에 칼날을 겨눈다. 수많은 진실을 간과한 채 ‘말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말해지게끔 만드는 인간의 교만을 그는 보고 싶지 않았다. 말해지는 것이 불가능한 진실은 몸에 각인된 채 완연한 존재감을 드러낸다고 믿는 그를 통해 누군가의 삶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함은 더욱 자명해진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속 ‘나’도 온전한 이해의 불가능성과 무의미함을 마주한다. 만사에 인과를 부여한 상태로 이해의 과정에 들어서기엔 삶이 지극히 연쇄적인 우연들의 직조에서 파생된 결과물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박지원의 지구의부터 박규수, 김옥균, 갑신정변, 민영익의 부상, 알렌의 등장, 제중원의 설립, 그 집 뜰에 서 있던 나무 한 그루, 그 나무를 마주했었던 그녀와 ‘나’에 이르기까지 역사는 실로 우연의 연속이다. 하지만 우연의 연속이 통시적인 흐름 속에서 인과의 연결고리를 형성하면 이는 필연의 가면을 쓸 수 있다. 즉 필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기에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임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인식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해의 매개가 되는 기억 역시 선명함을 담보하지 못하니 확실한 이해라는 것은 지성의 영역이되 지성의 소관이 아니기도 한 모순된 불가함을 보여준다. 일련의 삶이 우연인지 필연인지를 가늠하는 것조차 이쯤에서는 실로 무의미하다. 삶은 그저 관조될 따름이다.    


② 김연수 소설의 2단계: 시점의 다각화를 통한 삶의 다양성 조망


    삶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인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느낀 후 이어지는 노력은 바로 시점의 다각화이다. 어느 관점에서 삶을 조망하느냐에 따라 달리 보이는 다양성의 차원에서 통념으로부터의 탈피는 물론 새로운 접근이 가능해진다. 김연수는 여기서 인칭의 문제를 대두시킨다. 자아의 정체성이 만연한 1인칭 시점부터 모든 것을 관조하는 3인칭 전지적 시점까지 삶을 관통하고자 하는 노력은 다채로운 가능성을 조명한다. 대표적으로 철저히 자아에 입각한 1인칭 시점에서 바라보는 삶이 있다. 「뿌넝숴」에서 과거의 전쟁을 이야기하는 노인은 전쟁에 진실이 있을지언정 전쟁을 이야기함에는 진실이 없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그는 진실이 없는 이야기를 너무나도 상세하게 늘어놓으며 경험에서 파생된 감정을 반추한다. 하지만 그의 감정은 과연 거짓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렇지가 않다. 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라는 노인의 말처럼 살아왔던 진실한 삶이 부정당해야 할 이유는 없다. 단지 제목처럼 ‘말할 수 없는’ 우리네 삶이기에 믿음과 의심 사이를 오가며 불완전한 기억으로 점철될 뿐이다. 결국 진실이 아니더라도 발화를 통해 살아남는 기억의 파편들이 응집하는 결속에서 삶은 제각기 의미를 찾는다. 1인칭 시점은 이처럼 스스로 직조하는 삶의 불완전함, 그래도 여전하게 건재한 의의를 동시에 조명한다.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속 ‘나’는 ‘그’의 삶을 1인칭과 3인칭 시점을 오가며 바라보고 있다. 1인칭으로써의 ‘나’는 ‘그’와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며 완연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양가적인 인지를 경험한다. “죽는 순간까지도 당신에게는 용서해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잖아요. 당신과는 용서를 구할 일이 없을 만큼 사랑했으니까”(126면)라고 말하는 ‘나’는 ‘그’가 처한 상황을 모두 이해한다는 듯 이야기를 꺼낸다. ‘그’가 쓴 소설을 평하고 분석하며 여자친구의 심정을 단정하기도 하면서 미지의 심연을 궁구하고자 애를 쓰는 ‘그’를 사랑하기도 하는, 이성과 감성의 혼재를 마주치는 것이다. ‘나’는 분명 앎의 한계를 아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의 생각이 담긴 소설과 타인의 정서적 차원마저 자신의 사고에 입각해 재단하려는 모습은 관계에 있어서 당사자가 취하게 되는 입장의 한계를 보여준다. 여자친구가 자신을 사랑했는지 당최 알 길이 없는 자에게 그러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진실이 아님에도 그렇다는 듯이 얘기할 때 ‘나’는 어느 순간 ‘그’의 삶에 버릇처럼 주석을 달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3인칭의 시점으로 전환한 후 거리감을 조성하고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나’는 신중한 짐작을 이어간다. 이제 ‘그’를 알아갈 수 있는 통로는 미완의 등반일지 뿐이다. 같은 공간에서 숨 쉬며 말과 감정을 공유했던 ‘그’는 죽었다. 심지어 등반일지가 작성될 당시에 대한 어떠한 진실도 유효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조심스럽게 접근을 시도한다. 모상으로 존재하는 두루마리를 바라보며 주석을 달았던 ‘나’의 삶이 다른 형태로 재현되는 셈이다. 타인의 언급과 일지에 적힌 파편적인 상황들에 기인해 ‘나’는 설산을 상세하게 서술하지만 이는 결코 진실이 될 수 없다. 원저자인 혜초도 죽고 왕오천축국전의 원본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합리적인 의미를 부여해 주석을 단다고 해서 이를 진리라고 여길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3인칭으로 존재하는 ‘나’는 1인칭일 때 할 수 없었던 ‘상상’을 가미한다. 알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럼에도 알아가겠다고 삶의 노선을 정한 ‘그’를 기리기라도 하듯이 ‘나’는 빛나는 설산처럼 가장 아름다운 상상을 일지의 마지막에 더했다. 정답은 존재하지 않지만 정답으로 여겨질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시점의 변화가 말해주고 있다.    


③ 김연수 소설의 3단계: 실재에 대한 불신과 새로운 의미 투영


   김연수는 소설 속 다양한 역사적 사료나 삶의 흔적들에 불신을 표명했다.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이등박문을 안중근이 쏜 것은 역사가 결정한 사안이며 우연이었다. 전직 교수가 안중근을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라 칭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안중근 일행의 계획에 따르면 이등박문을 우덕순이 쏠 수도 있었기에 안중근의 거사 성공에는 뚜렷한 인과관계란 존재하지 않았다. 안중근이었기에 이등박문을 제거할 수 있었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안중근의 거사를 개인적인 소영웅주의로 모는 것은 부당하기 이를 데 없는 자조적 견해에 불과하다는 것”(189면)은 광활한 민족성을 편협하게 규정하는 세간의 통념에 대한 일침이다.     


   동생 성수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여자에게 구혼을 한 것이나, 우덕순이 이등박문을 쏘지 못한 일이나 어쩌면 성재가 인생에서 굳이 마주하지 않아도 될 일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연처럼 삶 속으로 다가온 일들이라면 나름의 고민과 질문, 그리고 답을 이어가는 것은 필연적인 숙명일 수도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사안일지라도 이것이 인간사의 근원이자 본질 중 하나라면, 심지어 인간사 전반이 필연을 가장한 우연으로 점철됐다면 더욱 그럴 일이다. 그래서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행위이다. 이해란 논리적인 인과관계를 기반으로 한 지적 판단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김연수는 매사에 확신을 배제했다.     


   확신이 사라진 소설 속 문장들은 모두 불분명한 색채를 내포하고 있다. 불신에서 비롯되는 머뭇거림이 문장의 투명도를 낮춰놓은 것처럼 명료하고 확정적인 태도는 소설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문장 사이의 맥락에는 숱한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의 해석도 의의를 수반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아래 문장들은 마치 공공재처럼 종이 위를 부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소설 속 화자들은 일상 속의 작위적 행태가 야기하는 깨달음의 단계를 거친다. 인생의 진리를 탐구한다는 행동 자체가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붓기라는 깨달음이 그것이다.     


   진리라는 원석이 있다면 이는 존재하는 이상 필연적으로 마모의 과정을 맞닥뜨리게 된다. 시간, 언어 등의 외부적 요인들로 인해 진리는 마모를 거듭한 채 인지되기에 이른다. 보기에는 간명하고 아름다울 수 있으나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한 한계이다. 그래서 김연수는 각자가 바라보는 대상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함에 있어 방임(放任)의 단계로 들어선다. 불완전한 진리를 불완전한 문자로 궁구해야 하는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감에서 선택한 길은 결국 ‘모든 것은 틀리기도 맞기도 하다’는 중의적 태도의 표명이었다. 그렇게 소설들은 모호한 입장을 지닌 채 전환을 맞이하는 찰나에 끝을 맺는다. 이처럼 완성형으로 마무리되지 않는 소설은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전주곡의 느낌을 지닌다.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속 소설들이 지닌 열린 결말의 구조는 새로운 의미가 투영될 수 있는 여지를 상징한다. 일상에서 스쳐지나가는 숱한 생각들의 마찰이 발생시킨 문제의식과 이로부터 비롯된 본질에 대한 궁구 의지는 결국 인간이 미칠 수 있는 영역의 한계를 확인하고 인정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엄밀하게 소설의 핵심은 이 이후에 존재한다. 9개의 단편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확신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독자에게 넌지시 묻는다. 김연수는 사실과 허구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손을 놓고 있으라고 종용하진 않는다. 그저 그 모호한 경계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어보고 의미를 부여하며 삶의 단면이 주체적으로 뚜렷해질 수 있는 여지를 같이 탐색해보자고 물을 따름이다. 이런 차원에서 새로운 의미의 투영이란 으레 맞다 여기는 것을 맹목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정확한 이해가 불가하다는 전제 하에 각자의 가능성을 타진하며 생각을 이어가는 행위의 총체이다.    


마치며

    

   혹자는 김연수의 소설을 불가항력적인 체념이자 비관적인 인식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김연수의 태도에는 이해 불가한 영역에 닿고자 노력하는 인간의 숭고한 집념이 조명하는 아름다움이 묻어있다. 온전치 못한 원본에 주석을 다는 것이 무의미한 진리 추구가 아니라 또 다른 원본을 생산해내는 진일보라는 차원에서 김연수는 비관론자가 결코 아니다. 제각기의 의미를 가미한 상상력이 문장을 통해 발현될 때 비로소 소설 속의 인물들, 그리고 읽는 독자들은 적확한 틀에서 벗어나 가늠하기 힘든 크기의 희망과 가능성을 마주한다. 일원화된 본질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 바로 새로운 시작점으로 자리매김하는 대목인 것이다.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마지막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자 한다. 설산에서의 죽음 이후 ‘그’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 다시 재생된다. 망자에 대한 예의를 갖춘 상상이라는 말과 함께 보편적이기에 타당한 시선은 ‘그’의 마지막 순간을 그려낸다. 하지만 ‘나’가 그려낸 ‘그’의 마지막 순간은 결코 마지막이라고 할 수 없다. 진리 탐색을 위해 매순간 진일보하는 한 인간의 정점을 조명하고 이후 궁극적인 지향점에서의 새로운 희망과 시작의 여지를 하얀 설산에 투영시킨 ‘나’의 상상은 규정할 수 없는 삶의 다면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영육이 상존하는 삶은 종식됐을지언정 그 삶을 되짚고 그려내며 형성된 상상은 무한한 가능성에 힘입어 생동함은 물론 나름의 의미를 부여받아 주체적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상상의 대상에게 가지는 일련의 감정과 생각들이 모여 직조된 사고는 현실적 관념의 한계를 인정함과 동시에 새로운 생각의 시작점으로 온전하다. 현세의 매사는 확신을 담보하지 못하기에 무수한 가능함이 나타날 수 있으며 이는 각자의 영역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렇게 김연수는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생겨날 수 있는 일들에 여지를 뒀다.     


   그는 무분별한 확신을 거부하며 확신을 세웠다. 엄밀한 진리 추구의 성역은 무너졌지만 그로 인해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조명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일전에 그는 소설을 쓴다는 것은 누군가의 인생을 이해할 수 없다는 자명함을 돌파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말했다. 불가능해도 가능함을 타진해야 한다는 의지가 있었기에 김연수의 소설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소설에서는 완성이 결코 미덕이 아니다. 어쩌면 설산 속 등반일지의 마지막이 미완인 것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함부로 매듭짓지 않겠다는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깔끔하게 직조되고 추앙되는 작위적 진리의 영역이 오히려 본질에서 더욱 어긋날 수 있음을 김연수는 강조하고 있다. 거짓된 글쓰기에서 탈피해 시나브로 삶을 더듬으며 저마다의 의미가 생생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소설 본연의 역할임을, 김연수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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