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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Oct 27. 2021

푸른 낙엽

붉은 낙엽을 싫어한 너에게

올해 가을빛은 오늘 저녁 양화대교에 걸터앉은 붉은 노을로 대신해야지. 노랗게 바랜 종이 위에 끼적인 독백. 형석은 이렇게나마 가느다란 생의 마지막을 어루만졌는지도 모른다. 왜 내게 마지막 정리를 맡겼을까. 자기 사는 얘기는 좀체 꺼내지 않던 녀석인데. 


뭉텅한 생각에 잠길 즈음 집주인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친구 분이에요? 빨리 좀 치워줘요. 이게 웬일이야. 귀신 들까 무섭네. 뒤돌아나가며 내뱉는 무심한 짜증이 메아리마냥 귓등을 때렸다. 순간 부아가 치밀었다. 웬일이라는 말이 이토록 별로였나. 하긴, 방도 안 들여다보는데 떠난 사람 마음 들여다볼 리가 있나.


컥컥. 뿌연 먼지와 퀴퀴한 묵은내가 코끝을 엄습했다. 회색 커튼을 열어젖히자 빛이 들어왔다. 왜 이 좋은 날에. 아니, 좋은 날을 안고 떠나고 싶었던 걸까. 평소 형석은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 특히 단풍잎이 흐드러진 나무를 보면 수십 번이고 셔터를 눌러댔다. 그리곤 이파리 하나를 톡 떼어내 주머니에 넣곤 했다.


야. 이걸 그대로 코팅하면 색이 안 변해. 떨어진 잎이지만 영원히 푸르다니까. 푸른 낙엽. 난 이게 참 좋더라. 붉게 메마른 낙엽은 별로야. 건드리기만 해도 찢기고 바스러지잖아. 잎을 손에 쥐었을 때 설렘은 보드라웠으면 좋겠어. 푸른 낙엽이 딱 그래. 그 감촉을 만끽하고 코팅해서 그 시간을 박제하는 거야. 그리곤 어느 책에나 끼워두는 거지. 잊을 만하면 생기 넘치는 설렘을 마주하도록 말이야. 나는 그냥 이따금씩 돌아갈 시간을 남겨두고 싶더라. 매일 내딛는 발걸음이 무거워질 때마다. 아니다. 그냥 도망치고 싶은 건가. 몰라. 하여튼 오늘도 하나 건졌다. 너도 하나 떼어가.


쨍한 햇빛이 여물 즈음 좌우로 눈을 돌렸다. 각종 참고 서적과 기출문제집이 널브러진 책상. 이리저리 뒤틀린 이불. 바닥에 흐트러진 과자 부스러기. 생생하리만큼 어질러진 네 평 단칸방이었다. 책상 서랍을 여니 영수증이 가득했다. 9할은 편의점 영수증이었다. 제아무리 비싸야 5천원 남짓한 액수. 퍼석한 김밥과 짜디짠 라면으로 매일 저녁을 살아낸 모양이다. 공무원으로 살아가려면 근검절약이 미덕이라며 너스레를 떨더니만.


벽에는 메모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3년 버텼는데 1년 더 못 버티겠냐며 느낌표를 도배한 포스트잇이 눈에 들어왔다. 진해에서 상경해 8년 째 홀로서기를 하던 녀석은 늘 제법 의연하게 자기를 다독였다. 큰 거 바라지 않는다며, 9급 공무원 합격해서 타박타박 월급 받고 퇴근 후 야구 경기나 보러가는 게 꿈이라면서 말이다. 그렇게 주경야독하면서 돈 벌고 공부를 한 지 4년. 형석은 내게 변한 건 나이와 뱃살 밖에 없다는 푸념을 건넸다. 월세나 물가 모두 올라 컵라면 크기도 작은 걸로 바꿀까 고민하는 자기가 싫다면서.


며칠 전 편의점에서 소주 한 잔 기울이며 나눴던 얘기가 떠올랐다. 야. 절박함도 상대적인 걸까. 가령 컵라면이 아니라 과자봉지 하나로 며칠을 때우는 삶이 있다면 그게 더 절박한 걸까. 그래서 내 노력이 닿지 않는 걸까. 노력을 휘두르는 곳이 허공이라면 흔적일랑 남는 걸까. 나는 다시 핸드폰을 열고 문자사서함을 들여다봤다.


밤이란 게 참 무섭더라. 고요한 공기도, 별빛 한 점 없는 새카만 하늘도 말이야.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깜깜해. 숨을 쉬어도 죽은 기분이더라. 그래서 안녕을 고하기엔 너무 억울한 시간이야. 그래서 아침을 기다리기로 했어. 어제 노을 한 줌을 담았으니 오늘 아침햇살도 한 줌 담고 가려고. 분주한 세상 소리 담고 가면 덜 외로울까 싶다. 친구야. 염치 불구하고 부탁 하나만 할게. 네가 내 흔적을 지워줘. 최대한 말끔하게. 아침 댓바람부터 구차한 부탁이라 미안하다. 그리고 늘 고마웠어. 참. 올해 가을은 어땠는지 나중에 들려줘.


다 비운 책상 귀퉁이에 처박힌 빨간색 노트. 형석의 일기장이었다. 뒤적이다보니 부채꼴 모양을 한 초록 단풍잎이 책갈피처럼 껴 있었다. 단풍잎은 이틀 전 일기와 사흘 전 일기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 나는 이틀 전 일기 마지막 문단을 펼쳤다. 아무래도 푸른 낙엽은 되지 못하려나보다. 운명이 나를 떼어내 박제시켜주지 않으니 말이다. 나는 알아서 떨어질 붉은 낙엽의 운명이다. 하지만 메말라 떨어질지언정 바스러지긴 싫다. 지금 떨어지면 홀연히 바람에 실려 사라질 수 있을까. 무턱대고 밟히기 전에.


창문 밖을 바라봤다. 올해는 유달리 나뭇잎이 푸르다. 가을이 사라진 탓인가. 시월에 푸른 나무라니. 네가 싫어한 붉은 낙엽은 어디에도 없다. 좀 더 기다려보지. 아쉬운 혼잣말을 털어내며 남은 짐을 정리했다. 그렇게 나는 형석에게 해줄 말을 품은 채 방을 나섰다. 네가 떠난 그 해 가을은 쉴 새 없이 푸르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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