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 - 서술
고의는 아니었어, 라고 그가 말했다.
늦은 오후의 카페는 한산했다. 커플들의 목소리와 원두를 로스팅하는 소리가 카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커플이라면 이 자리가 좋다며 종업원이 안내해준 구석진 창가 자리에 앉았다. 밖에는 내 속도 모르고 눈이 내리고 있었다. 뭘 마실 거냐는 물음에 나는 카모마일 허브티, 그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앞에 놓인 허브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 모금 마시고 그에게 물었다. 고의가 아니었다고? 그가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깁스를 한 내 팔을 흘낏 쳐다봤다. 그래, 죄책감은 들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태연한 표정으로 있었다. 고의는 아니었어. 다시 씨익 웃으며 그가 말했다.
우리가 커플로 보이나 봐. 그가 평소보다 높은 톤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원두를 로스팅하는 소리가 뚝 끊겼다. 카페를 조금이라도 시끄럽게 하던 소리가 사라지자 나와 그의 숨소리가 들릴 듯 했다. 그가 장난기 서린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뱀. 그 눈을 보자마자 뱀이 생각났다. 매끄럽게 빠져나갈 생각 중이겠지, 또. 목이 타 허브티를 마셨다. 쓴맛에 얼굴을 찡그리니 그가 웃었다. 웃지 말고, 말해. 그의 눈이 커졌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내 팔,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그가 우습다는 듯이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사정이 있어서 오늘은 빨리 문을 닫아야 해서요……. 종업원이 난처해하며 말했다. 카페를 둘러보니 남은 사람들은 우리뿐인 듯했다.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어느새 카운터에 서 있었다. 오늘은 꼭 알아내고 말겠다는 다짐을 하며 카페에서 나왔다. 그림자처럼 내 뒤를 따라오는 그가 콧노래를 불렀다. 어디 가는데? 그가 흥얼거리며 물었다. 내 작업실. 내 말에 그는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콧노래를 불렀다. 진짜, 징그럽다 너.
근 한 달 만에 불이 켜진 작업실은 엉망이었다. 여기저기 쌓인 먼지 때문에 작업실 전체에서 쾨쾨한 냄새가 났다. 내 뒤에서 작업실을 보고 있는 그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부엌으로 갔다. 원룸인 작업실 한 켠에 마련된 부엌은 좁았다. 그 좁은 공간에 억지로 밀어 넣은 2인용 식탁. 그곳에 그가 앉아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대로네. 그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넌지시 말했다. 그는 묘하게도 입만 웃고 있었다.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빨려들 것 같은 느낌에 그 눈을 노려봤다. 그러자 그의 눈에는 다시 장난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허물을 벗은 뱀이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오늘 모든 것을 끝내지 않으면 다른 한쪽 팔도 위험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뭐가 문젠데. 그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있냐는 듯한 그의 태도가 역겨웠다. 한숨을 쉬고 맞은 편에 보이는 캔버스를 가리켰다.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니가 내 팔을 이렇게 만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리던 그림이야. 그는 여전히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보면서 입술을 깨물다가 다시 그림을 봤다. 밑그림만 그려진 해바라기. 그가 흐음, 하고 콧소리를 내더니 방으로 다가갔다. 가지마. 그가 내 말에 움찔하더니 다시 방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그가 뒤를 돌아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기시감이 느껴졌다. 내 팔이 이렇게 됐을 때 본 듯한 표정. 두려움에 눈을 감았다. 그가 내 손을 뿌리치고 걸어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붙박이가 된 것 마냥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북북 거리는 소리가 내 귀를 때렸다. '설마'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허탈감이 밀려왔을 뿐, 발악하며 말릴 수 없었다. 분명 이건 내가 예상한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어쩌면 이렇게 될지도 몰라, 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그뿐,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 마음과는 달리 몸이 덜덜 떨렸다. 그림을 여기에만 보관하지 않은 게 다행이야. 미친 듯이 떨리는 몸을 진정시켜보려 생각했다. 그가 방에서 나오며 나를 의아해하며 쳐다봤다. 방금 행동이랑 다르잖아, 왜 안 말리는 거지? 그의 눈이 그렇게 말하는 듯 했다. 나도 모르겠어, 나도……. 그 물음에 대한 답은 그것밖에 없었다. 상반되는 반응을 하는 머리와 몸. 어느 쪽이 진짜인지…….
그와의 만남에서 확실히 한 건 그가 악랄한 사람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그것뿐이었다. 그에게 왜 그러냐는 물음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서 봤던 것은 광기였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눈이 살아있어서 좋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잘 포장된 광기였다. 누군가를 잡아먹으려는 포악한 포식자의 눈빛이었다. 사실 나도 한심하다. 주변 사람들이 그에 대해 쉬쉬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와 어울렸으니까.
그 팔, 못 쓸지도 몰라요. 어제 병원을 갔을 때 들은 말이었다. 되물을 수 없었다. 똑같은 대답을 또 듣기 싫었기 때문에. 의사 선생님이 한숨을 내쉬고 나를 쳐다봤다. 괜찮겠어요? 병원의 벽만큼 머리가 하얘졌다. 당연히 괜찮을 리가 없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하는 사람인데, 가장 중요한 팔이 망가졌다니……. 내겐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물리 치료받으면 어느 정도 괜찮아지긴 할 거에요. 의사 선생님의 말이 둥둥 떠다녔다. 작업실에 남은 해바라기 그림이 생각났다. 내 처지가 그 처지와 같은 거였구나…….
시간은 빛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그러는 동안 나는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왼손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결국 한국을 떠났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는 오래전부터 꿈을 가진 사람을 짓밟고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 피해자가 우리 대학교에만 해도 한둘이 아니라는 것을 보면, 맞는 말인 것 같다.
이젠 그를 증오하지 않는다. 아니, 증오할 수 없다. 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고 든 생각은 그가 불쌍하다는 것뿐이었다. 그의 짓밟음은 광기이기도 했지만, 꿈이 없어서 하던 포효가 아닐까 싶다. 타지에서 또 다른 사람의 꿈을 짓밟고 있을 그를 생각하면 징그러웠지만,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 또한 꿈에 대해 갈망하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