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타 사야카의 <편의점 인간>에서 찾은 접점들
소설이 재밌는 이유는 사실 여러 가지다.
스토리 자체가 주는 긴박감(!)이 있어 오락적 요소 덕에 재밌는 경우도 있고,
다양한 상상의 세계를 탐험함으로써 새로운 세계가 주는 경이로움 때문인 경우도 있다.
최근에 읽은 무라타 사야카의 <편의점 인간>이 잔잔하게 재밌었는데 그 이유는,
소설의 주인공과 나의 닮은 구석을,
소설 속의 사회상과 지금 내가 사는 사회의 공통점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책 이야기를 하려면 소설의 줄거리는 적어야 할 것 같아서 알라딘에서 살짝 가져왔다.
서른여섯 살의 주인공 ‘후루쿠라 게이코’는 모태솔로에다 대학 졸업 후 취직 한번 못 해보고 18년째 같은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 계속 바뀌는 알바생들을 배웅하면서 여덟 번째 점장과 일하고 있는 게이코는 매일 편의점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정해진 매뉴얼대로 정리된 편의점 풍경과 “어서 오십시오!”라는 구호에서 마음의 평안과 정체성을 얻는다.
하지만 적당한 나이에 일을 얻고 가정을 꾸린 주위 사람들의 수군거림에서 게이코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그녀 앞에 백수에 월세가 밀려 살던 집에서도 쫓겨나고 항상 남 탓만 하는 무뢰한, ‘시라하’가 나타나면서 겉보기에 평안한 그녀의 삶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는데….
- 출처: 알라딘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95368192
누군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편의점보다 좋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이니 이 보다 낫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보기엔 도긴개긴이다. 육체노동자이냐 정신노동자이냐 정도의 차이일 뿐, 회사의 직원으로서 돈을 받고 노동력을 제공하며 부품처럼 쓰이고 교체되는 건 매한가지다. 어디에 어떤 형태로 고용되어 어떤 노동을 하느냐의 차이일 뿐 자본주의 쳇바퀴를 돌리는 일원으로 다 같은 처지란 생각이 든다. (그 안에서 굳이 가를 필요까진 없다는 것이지 그게 다 부질없다는 뜻은 아니다.)
혹은 `나는 모태솔로도 아니고 결혼도 했으니 승자로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과연 그럴까.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연애를 했느냐, 결혼을 했느냐 보다 내가 추구한 모든 것이 진짜 내가 원해서 한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자의식이 분명하고 자기 결정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세상이 정한 길이나 답에 나 스스로를 얼마나 맞췄느냐는 결코 만족할 만한 포인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 "요즘 만나는 사람 없어?"
- "연애 오래 했는데 이제 결혼해야지~"
- "아기는 언제 낳을 거야?"
이 모든 질문은 모든 사람이 (이성과) 연애해야 하며, 연애하는 자 결혼하고, 결혼하는 자 아이 낳아야 함을 기본으로 깔고 있다. 대체 왜? 연애를 왜 해야 하죠? 결혼을 왜 해야 하지? 아이를 왜 낳아야 하는가? 사람이 다 다를진대, 연애 안 하고 혼자가 더 좋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이성이 아닌 동성을 좋아할 수도 있고 - 양성을 다 좋아할 수도 있고 - 연애는 하되 결혼은 안 할 수도 있고 - 동거만 할 수도 있고 - 결혼은 했으나 자녀를 안 가질 수도 있고. 이 세상의 그 수많은 다양한 삶의 방식을 왜 존중하지 않는 걸까... 이 소설에서 묘사하는 주변인들의 반응이나 대화에서 소름 돋게 우리 사회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이 소설에 보면 동생이 일종의 프로토콜 같은걸 알려준다. 이런 질문에 이렇게 답하는 게 좋겠다고.
나의 경우 어떨 때 이런 게 필요하나면, 짝꿍의 가족을 대하는 일에서 필요하다. 우리 둘이야 수년간 교제하며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서로 소통하는 법(?)을 잘 맞춘 케이스지만 짝꿍의 가족과는 함께 보낸 시간도 많지 않고 소통 방식이나 인생관에 대한 싱크가 맞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내 방식대로 말하다가는 버르장버리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나에겐 사회적으로 적당한 답변이 입 밖으로 나오는 것도 아니라서 정해주는 대로 말하는 게 가정의 평화(?)를 위해 최적의 방법이란 생각이 들기에 나는 짝꿍에게 가이드를 요청한다.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내가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알려줘. 그럼 그대로 할게."
과연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 짓는 기준은 무엇일까. <편의점 인간>을 읽으면서 <채식주의자>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편의점 인간>의 주인공이 비정상인 듯 보이지만 한편으론 정상이고, <채식주의자>의 영혜 역시 비정상이라기엔 그 나름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자기가 정한 답만 답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맞게 타인을 욱여넣으려는 다른 사람들이 더 비정상 아닐까? 한편으론 이 세상에서 미치지 않고 정상으로 사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싶기도 하다. 미치지 않은 사람이야 말로 비정상일지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그런 박진감 넘치는 소설은 아니지만 잔잔하게 재밌게 읽히는 글이었다.
책에서 인상 깊었던 구절로 마무리...
"밖에 나가면 내 인생은 또 강간당합니다. 남자라면 일을 해라, 결혼해라, 결혼을 했다면 돈을 벌어라, 애를 낳아라. 무리의 노예예요. 평생 일하라고 세상은 명령하죠. 내 불알조차 무리의 소유예요. 성 경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정자를 낭비하고 있는 것처럼 취급당한다니까요."
"그건 괴로운 일이죠."
"당신 자궁도 무리의 소유예요. 쓸모가 없으니까 거들떠보지 않을 뿐이죠. 나는 평생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평생 누구한테도 간섭받지 않고, 그냥 숨을 쉬고 싶어요. 그것만 바라고 있습니다."
* 표지 및 본문 이미지 출처: Unsplas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