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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바람 Aug 11. 2023

참 인생은 쉽게 얻어지는 게 하나도 없다.

다른 사람은 속여도 나 자신을 속일 순 없어.

 내 나이 만 24, 사회에선 아직 애송이라 코웃음 칠 나이일 수도 있고, 그 정도면 먹을 만큼 먹었지 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이제까지 느낀 건 인생에 쉽게 얻어지는 건 단, 하나도 없다는 거다. 나는 하고 싶은 게 많고 이루고 싶은 게 참 많다.

대학은 체육학과(정확히는 스포츠 과학부)를 전공했는데, 이마저도 1년 반가량 입시운동을 힘들게 해서 입학했다. 고등학고 국어시간에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곳에 기억나는 나의 버킷들을 몇 가지 나열해 보자면, 유도 1단따기, 합기도 4단따기, 중국 가서 쿵후 배우기, 배드민턴 배우기, 수영 배우기. 이런 스포츠를 배우는 것들이 참 많았다. '어? 나 운동하고 싶나 보네? 그럼 체대 진학해야겠다' 하며 단순하게 생각했다.

 뭐 예체능으로 입시를 준비했지만, 나는 이공계였고 주변에는 공대나 간호학과 간혹 가다가 공부에 특출 난 친구들은 의대를 준비했다. 이과에서 예체능 입시를 준비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 체대에 어떻게 진학할지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입시학원을 발견했다.

"엄마 나 체대 입시하려고"

"그래 니 맘대로 해 대신 책임은 니가져"

"응, 근데 나 입시학원 다닐 거야"

그렇게 엄마 카드를 가지고 입시학원 상담에 갔다. 나름 여기저기 학원을 알아보고 가장 가깝고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곳을 골랐다. 지방에서 체대입시학원을 다녔는데, 지방의 인프라 탓인지 전문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근육 컨디션이나 해당 종목발달을 위한 정확한 근육타깃팅을 해서 트레이닝을 시키기보단 그냥 굴렸다. 막 굴렸다는 표현이 정확할 거다. 오리걸음으로 언덕을 올라가고, 운동장에서 인터벌을 하는데 시간 안에 못 들어오면 계속해서 다시 뛰고, 1분 안에 윗몸일으키기는 55개 이상은 해야 중간이상 가는 거고, 1층부터 5층까지 뛰어올라가기, 한 발로 뛰어올라가기, 한 발로 두 칸씩 올라가기 그걸 매주 월, 수, 금, 실기시험 2달 전 시즌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1년 반가량을 준비했다.


당연히 근컨디션을 고려하지 않고 굴리다 보니 근육뿐만 아니라 관절에 무리가 왔고, 수능이 끝나고 2달가량  입시운동에 전념할 땐 무릎이 안 좋아 해당 종목들의 실적이 처음 왔을 때보다 한참 떨어졌다. 무릎이 통증 탓에 운동도 제대로 못했다.

"선생님 저 무릎이 너무 안 좋아요"

"그러니까 네가 관리를 제대로 했어야지"

라고 말했던 그 입시학원선생님의 말에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생각해 보면 안 하면 또 엄청 혼냈으면서!) 내 건강은 내가 챙기는 거다라는 신념이 강하게 자리 잡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9월 모의고사 점수에 맞춰 대학 실기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수능을 망했다. 망해도 개 망했다. 내가 지망하던 곳들을 하나도 못쓰고 실기 비중이 높은 곳으로만 골랐다. 무릎은 아프고, 내겐 실기가 중요한데, 수능은 망했고, 절대 재수는 없어라 말하는 부모님까지 아주 멘털이 무너졌었다. 1 지망은 안전빵으로 넣었고, 2 지망은 중간정도, 3 지망은 체대가 아닌 일반학과를 썼다. 그래도 이과라고 컴퓨터 공학과였다. (그때 3 지망으로 갔으면 취업걱정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결정들에 부모님은 아무런 조언을 해주지 않았다. 당시 집안 사정이 어려웠던 탓도 있지만, 부모님은 당신들의 한마디가 내 인생에 영향을 미쳐 부모를 원망하는 말을 듣기 싫다고 말했다. 어떤 고민이든 외면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답답했다. 다른 부모님들은 진로에 대해서, 입시에 대해서 엄청난 관심을 가지는데 왜 우리 부모님은 그러지 않을까. 심지어 부모님 지인들과의 식사자리에서 "고3? 피곤하다던데 난 하나도 안 피곤 해, 우리 딸이 알아서 잘하는데 뭐. 신경 쓸게 하다도 없더라"라고 말했다. 부모님은 그냥 나를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는 게 그저 습관이 돼 말을 하지 않으니 우리 딸은 뭐든지 잘해 싹싹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던 것 같다.

 대학 원서를 낼 시기가 왔다. 담임선생님인 황선생 님이 아직도 기억난다. "너는 예체능이니, 내가 특별히 터치하지 않겠다. 입시학원에서 알아서 해줄걸 안다. 다만,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라."라고 말해줬고, 내가 학원에 가야 할 때마다 별말 않고 잘 보내주셨다. 아픈 무릎, 그리고 으깨진 멘털, 나를 따라 줄줄이 우리 학원으로 왔던 동급생 아이들이 뒤에서 내 욕을 하고 다녔던 건 생략. 그냥 울면서 엄마를 찾았다.

"엄마, 나 체대에 안 갈 수도 있어, 3 지망은 일반학과로 쓸래"

"그럼 너한테 들인 돈은, 거기 안 가면 뭐 할 건데"

"엄마, 다른 엄마들은 다 입시에 관심 가지고 고민 들어주는데 엄마는 뭐야? 왜 그런 말만 해?"

"사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겠어. 아무것도 모르겠어서 그래"

그렇게 엄마랑 껴안고 엉엉 울었다. 너무 힘들어, 그냥 너무 힘들어 아픈 것도 수능 성적이 이런 것도 다 힘들어하면서 엉엉 울었다.


그래도 한의원에 열심히 다니며 컨디션을 되찾았다. 1 지망대학은 최초합을 하고 2 지망 대학은 예비번호를 받았다. 3 지망 대학은 쳐다도 안 봤다. 난 무조건 체대에 가고 싶었다. 결국 체대에 갔다. 배우고자 하는 것을 배우고, 체육에 관한 모든 학문에 흥미를 붙이니 아주 날아다녔다. 대학 와서 공부하는 걸 생각해 보면, 고등학생 때 나는 불안에만 휘둘리기만 하고 열심히 하진 않았다. 결국 남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인다. 내 행동을 내 태도를 다 기억하니 말이다. 대학에 가선 매 학기 석차는 5등 안에 들고, 학점은 4.5만 점이 4.0 이하로 내려간 적도 없고 과탑도 했다. 합기도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시합에 나가 메달을 3개 따고, 유도 수업을 들으며 시합에서 메달 따오면 에이플러스를 준다는 말에 유도 메달도 2개 땄다.

 생활체육지도자도 2 종목 취득하고, 스포츠경영관리사 자격증도 땄다. 졸업할 땐 무슨 상패도 받았는데, 그 사진이 1년이 지나도록 아빠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다. (아빠 이제 바꿀때 된거같아 힝)뭐든 열심히 임하는 태도 탓인지 교수님들의 귀염둥이가 돼서, 아직까지 "교수님 뵙고 싶어요"하며 연락드리거나, "00아 보고 싶다"라며 연락이 온다. 참 정이 넘치고 감사한 교수님들.


 이제, 또 다른 고난은 복수전공을 하면서 시작된다. 나는 앞서 말했듯 이공계였다. 이공계여도 2학년때까지는 제2외국어를 배워야 했는데, 난 그때 일본어와 중국어 중 중국어를 선택했다. 어릴 적 한문을 4급까지 따놓은 탓에 한자는 내게 익숙했고 중국어의 성조가 내겐 참 매력적이었다. 첨밀밀이라는 영화의 여자배우가 매력적이었고, 문장을 배우고, 낯선 언어가 익숙해져 이해되는 과정이 참 좋았다. 이공계 중국어 시험에서 3등을 했다. '생기부에 중국으로 진출할 인재이며...'라는 엄청난 칭찬이 적혔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고,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이 된다고? 하며 대학에 가면 꼭 중국어를 배우겠노라 다짐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여러 가지 자격증 대외활동에 욕심 있던 나는 벽에 붙어있던 포스터를 참 유심히 보고 다녔다. 장학생이며, 상품이며, 여행이며 대학생인 내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은 참 많았다. 그중 단연 눈에 뜨였던 건 '공자학원 중국어 강의'였다. 한 학기에 15만 원 정도에 저렴한 비용이었으며, 원어민 선생님께 들을 수 있는 수준 높은 강의 거기다 나중에 장학생 신청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80프로 출석 시 50프로를 환불해 주는 이벤트까지. 대학생에게 딱 좋은 구조였다. 추후 중국에서 공자학원 공산당 스파이 추문이 터지긴 했지만, 내가 들었던 강의에서 사상 같은 걸 강요받은 적은 없다. 그저 선생님들이 하나하나 붙잡고 발음 교정을  해주고, 자료를 직접 다 만들어 수업했던 기억뿐이다.


 그 강의를 들어 중국 후난으로 장학금을 받아 단기 어학연수를 다녀온 뒤, 중국어를 복수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수 전공 졸업을 위해선 논문을 본과랑, 복수전공과 2개를 제출해야 하는데, HSK5급을 취득해서 내면 논문이 면제됐다. 

 난 오기로 6급까지 따고 졸업할 거야 했다. 문정아 중국어 평생회원반 강의를 들으며 4급까지는 땄는데, 5급은 독학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집 근처 학원에 다녔고 매일 단어를 100개씩 외우고 동시통역 연습하며 4개월 만에 취득했다. 6급도 참 매일매일 단어를 보고 매일 듣기를 하고 매일 오답을 하고, 독학 절반 인강절반해서 기어코 취득해내고 말았다. 그래도 아직 전문적인 중국어 용어들은 모르는 게 많고, 아직도 언어교환 친구와 주기 적으러 전화하며 실력이 퇴보하지 않게 노력 중이다. 이런 걸 보면 참 쉽게 얻어지는 건 하나도 없다. 죽을 만큼 노력하고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한번 더 하고, 또 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


모든 것들이 그렇다. 내가 지금 미쳐있는 서핑도, 크로스핏에서 역도를 할 때도 모두가 그랬다. 참 쉽게 얻을 수 없는 것들이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잘하게 할 거다. 나는 미국의 피겨스케이팅 선수 네이선 첸을 참 좋아한다. 그 선수가 피겨를 할 때면 참 행복해 보인다. 2022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정도 실력 있는 프로 선순데, 대학도 예일대학을 다닌다.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운동과 공부 무엇하나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다. 정말 힘들면 그의 피겨 영상을 보며 삶의 태도를 되새긴다. 훈련하며 쉬는 시간에 책을 펴 들어 시간을 촘촘히 활용해 원하는 바를 모두 이른 그의 태도를.


종종 누군가 뭔갈 잘하면 정말 쉬워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럼 그 사람은 그걸 미친 듯이 잘하는 거다.
그리고 그 미친 듯이 잘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과 시간 에너지를 투자했을 거다.
그럼에도 그런 시간들을 들여 기어코 성취를 해내는 것은
그만큼의 시야가 넓어지고 나에 대한 확신이 생기기 때문인 거다.  


참 무엇하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것 없대도, 그 쉽게 얻을 수 없는 과정을 즐겨보자. 남들에게도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일 거고, 그걸 얻음으로써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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