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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희 Mar 15. 2023

바람난 그를 기다리며

그가 바람이 났다. 그가 집을 비우기 시작한 것이 벌써 달이 차고 기우는 시간이 지났다. 처음엔 하루에 한 번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집을 찾았고 다음은 이틀에 한번 꼴. 지금은 일주일이 넘도록 발걸음이 없다.

그가 종종 집을 비울 때만 해도 바람이 났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녀를 우리 집에 데려온 게 그였으니.


어느 날 불쑥 그는 낯선 그녀를 데리고 왔다. 당황스러웠지만 어쩌겠는가. 그가 좋아한다는데, 죽고 못살겠다는데 말이다. 그녀가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를 찾아온 다른 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만은 못하다. 그는 그녀에게 끊임없이 구애하고 정성을 뻗쳐대는 또 다른 이를 너끈하게 제치고도 남을 훈남이다.

이놈의 외모지상주의. 시크한 매력을 풍기며 치열한 삼각관계 속에서도 그녀를 차지한 그가 아니던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끔씩 집을 비우긴 했지만 그녀와 알콩달콩 잘 지내던 사이였다. 물론 내게도 더할 수 없이 살가웠다.    

 

그가 집을 나간 처음 며칠 동안 그녀는 여전히 도도하게 굴며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달라졌다. 바람만 불어도 고개 들어 하늘을 보며 눈물짓는다. 하릴없이 내게 다가와 신세 한탄을 하기도 한다.

지나치게 먹성이 좋아 놀림을 받던 그녀가 밥도 남긴다. 마당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몇 시간이고 목을 빼고 있다.

그가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에 보는 나도 애가 탄다. 어디 가서 그를 찾는단 말인가? 그에게는 그 흔한 휴대폰도 없어 찾을 방도가 없다.      


간밤에도 그녀는 쉬이 잠들지 못하고 마당을 서성였다. 그와 함께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던 벤치에도 잠시 앉아 보다가 그와 손잡고 거닐었던 배롱나무 아래도 서성였다.

행여 그의 발자국 소린가 해서 실바람 소리에도 흠칫 놀라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나는 어제 장을 봐왔다. 행여 그가 올지 몰라서이다. 산해진미에 진수성찬은 아니지만 내 손으로 따뜻하고

정성 어린 밥 한상을 차려 주고 싶어서다. 청소도 했다. 그가 돌아오면 불편하지 않게 정갈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어서다. 그를 위해 마음을 다한 준비를 하면서도, 나와 그녀는 아직도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이유를

알 수 없다. 언젠가 돌아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기까진 바라지 않는다.

그저 그의 씨익 웃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 가리지 않고 복스럽게 먹는 그의 모습을 보면 나는 내내 흐뭇한 미소를 짓곤 했다. 단지 그런 그가 보고 싶을 뿐이다.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인지는 모르겠다.  

    

하루에도 몇 번씩 창밖을 보며 그가 오길 기다리는 내 모습을 보고 누군가는 그깟 놈 뭐가 대수라고 기다리냐 한다. 하지만 몹쓸 놈의 정이란 게 어디 그리 칼로 무 자르듯 하기 쉬운가. 이럴 거면 애당초 정 주지나 말지. 남은 이의 빈 가슴은 어찌 채우라고 이별 인사도 없이 떠난단 말인가.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다. 하지만 여름날 쉰 옥수수처럼 그렇게 빨리 변할 줄이야.

보고 싶다. 그가.


그녀와 나는 기다림으로 겨울의 메마른 가지처럼 말라 가고 있다. 너무 늦지 않게, 어느날 성큼 다가오는

봄처럼 그가 돌아오길 바란다.  

어제 저녁에도 밤하늘을 수놓은 별을 보며 그의 얼굴을 떠 올렸다.               

......




오늘.

그가 돌아왔다. 하마터면 반가움에 와락 껴안을 뻔했다. 하지만 그녀와 날 버렸다는 생각에 서럽기도 하고

밉기도 해서 토라진 척 눈을 흘겼다.

등짝 스매싱을 날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그의 몰골을 보고 차마  수 없었다.

눈두덩은 시퍼렇게 멍들고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한쪽 볼이 팅팅 부어서 왔다. 그런 그를 우리 둘다 못 알아볼 뻔했다. 얼굴은 꾀죄죄하고 행색은 남루했다. 그의 멋진 턱선아래는 군데 군데 검은 재가 묻어 더러워졌다. 옷에는 도깨비풀이 잔뜩 들러 붙어 있다. 자세히 보니 왼쪽 다리에는 깊은 상처까지 보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은 쏘옥 빠지고 기운은 없어 바람빠진 풍선마냥 늘어져 있다. 그는 밥상을 받자 마자 사흘은 굶은 듯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해치웠다. 따뜻한 물로 입가심을 한 후 그제야 머쓱한 듯 우리를 보고 싱긋 웃어 보인다. 그녀와 나는 눈짓으로 그가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왔는지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약자가 아니던가? 사랑한다는 일은 받아들이고 믿어야 함을 알았다. 기다려주는 마음이 있음을 알기에 그는 상처입고 지친 몸과 마음을 기대려 다시 돌아왔다.

그의 눈에 살짝 눈물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민망한듯 살짝 고개를 돌리는 그를 보고 '괜찮아'라고 말해 주었다. 그녀와 나는  내일 아침 해가 뜨고도 그가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러 있기만 바랄 뿐이다.




집 나가기 전 훤칠한 그의 모습


바람피고 돌아온 그의 몰골


대문사진 : 다음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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