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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희 Nov 18. 2022

그대 오어사에  와 보셨나요?

단풍 대신 낙엽길을


“내일 우리 단풍 구경 어디로 갈 껀데요?”

“글쎄, 당신 하는 거 봐 가면서, 못하면 경주 남산, 잘하면...”     

나는 잘 못했다. 냉장고에 있는 밑반찬과 배춧국으로 저녁밥상을 대충 차려 주었다.

하지만 마음이 넉넉한 남편은 ‘잘하면’의 보상이었던 포항 오어사로 데리고 간다.     


요 며칠 하늘은 우중충하고,

바람은 초겨울같이 날카로웠다.

하지만 오늘은 쾌청한 하늘에 햇살은 따사로워 소풍 가기엔 더없이 좋은 날이다.

오어지 둘레길을 가볍게 걸을 요량으로

편한 운동화를 신고 나서는 걸음에

나도 모르게 설렘이 묻어 난다.     


포항에 있는 오어사는 남부지방에선 단풍이 절경인 곳이다.

아이 어렸을 적에도, 지인들과도 여러 차례 찾은 곳이지만 사실 내겐 2년 전 기억밖에 없다.

메모리 축적기능이 한계에 다다랐는지 다녀온 곳도, 읽었던 책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한때 ‘암기의 왕’이라고도 불렸던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지는 않기로 했다. 남편이 이런 나를 놀릴 때마다 전신 마취 4번을 내세우며 입을 막는다.

어쨌든 올해도 우리 부부의 단풍 구경지로 오어사가 낙점되었다.     


주말이 아니라 그다지 붐비지는 않아 다행이라 여기며 경내로 들어섰지만

‘우야꼬’ 가장 아름다운 단풍은 이미 가고 없었다.

‘지난주에 왔어야 했는데’라고 후회는 했지만 그랬다면 무척 붐볐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어지 둘레길을 걸으러 갔는지 사찰안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없었다.

강아지 한 마리가 졸졸 따라다니는데

그 눈빛이 순둥순둥 하니 절에서 키우는 개답다.


오어사(吾魚寺)는 대웅전 외에는 대부분 새로 증축된 건물들이라 절 자체는

별 볼거리가 없고 유물관 안에

보물 1280호인 동종(銅鐘)과, 원효대사가 사용했다는 삿갓과 수저가 있다.

원효대사는 절의 이름인 오어사와 관련이 있다.


내 물고기라는 뜻의 오어사는

신라 고승 원효(元曉)와 혜공(惠空)이 함께 법력을 겨루던 장면에서 비롯된다.

계곡에 노니는 물고기를 보고 한 마리씩 산채로 삼킨 후 바위 끝에 앉아 대변을 봐서

산채로 물고기가 나오면 이기는 걸로 내기를 했다.

그런데 두 마리 물고기 중 한 마리는 살아서,  다른 한 마리는 죽어서 나왔고

살아있는 물고기는 활기차게 상류로 올라갔다.

그것을 보고 서로 "저 물고기가 내 물고기야"라고 한 데서 오어사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절 바깥쪽에는 오어지라고 부르는 큰 저수지가 있다.

주변에 둘레길을 조성하여 많은 사람들이 산책이나 운제산 등산을 하고 있다.

이전에는 저수지의 물빛이 초록이었는데 웬일인지 흙탕물이다.

며칠 전 비로 이 정도는 아닐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태풍 힌남노가 휩쓸고 간 상처였다.

태풍 피해로 무너진 주변의 냉천을 보수 공사 중이라 물길을 막아서 그렇다고 한다.     

자연재해의 무서움과 인간의 보잘것없음이 선뜻 와 닿는다.


둘레길을 걸으려면 출렁다리를 건너야 한다.

쫄보인 나는 남편의 팔짱을 바싹 당겨 끼고 엄청 친한 척하며 다리를 건넜다.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으려고 멀리 바라보니 오히려 건너편의 가을 풍경이 성큼 다가온다.

울긋불긋 고운 빛은 아니지만 가을을 느끼기엔 아직 충분하다.    

  

다리를 건너면 오어사에 관한 시를 적은 안내판이 보인다          

그대 오어사에 와 보셨나요/윤석홍     


그대 오어사에 와 보셨나요     

적바람에 잊고 있었던

혜공이 원효를 만나던 날     

오어사 동종이 바람에

뎅뎅 혼자 울고 있었습니다     

기운 빠진 여름이 풍경에

매달려 소리 공양을 올리고     

제비집처럼 지어진 자장암과

산 깊은 원효암에 올랐습니다     

오어지가 보이는 법당에

인연이 물살로 흔들리고     

산속 암자에 눌러앉아

그냥 쉬고 싶어 집니다     

혜공과 원효의 내공이

듬뿍 담긴 비빔밥 먹다     

고기 똥 떨어지는 소리에

물고기 바람 타고 올라갑니다     

그대 정말 오어사에 와 보셨나요       

  


둘레길은 벌써 낙엽길이 되어 있다.

‘사그락 사그락’ 낙엽 밟는 소리가 듣기 좋다.

천천히 바람을 타고 내 앞으로 낙엽 하나가 떨어진다.

나도 모르게 마음을 빼앗겨 넋 놓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남편이 옆에 없었다면 급 가을 타는 여인이 되어 눈물 한 방울 흘릴 뻔했다.


가을이란 계절은 그러한 계절이다.

조금은 내려놓고, 조금은 천천히 걷고 싶은 마음이 드는 그런 계절 말이다.



가을이 되면 많은 분들이 괜히 고독한 기분이 들어 싫다라고 수도 있겠지만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온전히 고독을 느낄 수 있을까.

쓸쓸함도 견딜 수 있는 계절이 가을이 아닐까 싶다.    

 

오늘 오어사를 찾으면서 단풍만 봤더라면 느끼지 못했을 여러 가지 생각이 겹친다.

한 방송사 오락 프로그램에서 낙엽 줄이란 표현을 썼다.

인생의 단계 중 중장년층을 일컫는 말이다.

실제 나도 직장에 근무할 당시 50대가 된 동료들이 자조 섞인 말로

이제 ‘낙엽 줄’이란 표현을 종종 내뱉곤 했다.      


 인생의 저물어가는 시기를 흔히 낙엽으로 표현하지만

낙엽이야말로 때를 알아

미련 없이 잎새를 떨궈

이듬 해 어린잎과 열매와 아름다운 단풍을 보게 하지 않는가.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경험과 지혜로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나눠주고 위로해 줄 수 있는,

나이 들지 않으면 모를 많은 것들을 품고 있다.

그러니 서러워 말아야겠다.          


점심때가 지나 다소 출출했다.

물회가 유명한 포항에서 그냥 오기는 섭하다.

오어사에서의  약간의 센티함과 사색은 간데없고, 맛있게 먹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멀미를 핑계 대며 내내 감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입을 하고 있었다.               

포항 명물 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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