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물려준 3종 세트

놀라워라 유전자의 힘

by 도희

“아들, 머리 예쁘게 깎았네.”

“네, 모처럼 집에 온다고 염색도 하고 미용실도 다녀왔어요.”

제 아들이 염색을 했네요. 무슨 색일까요?

힌트! 아들의 나이는 20대 중반입니다. 요즘 한창 힙하다는 애쉬 블루, 옴브레, 와인, 것도 아니면 금발?

아, 궁금하지 않으시다고요. 죄송해요. 저 혼자 방방 뛰어서.

근데 말 나온 김에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아들의 머리를 보니 속상해서 여러분께라도 하소연하고 싶어 졌어요.

네, 아들은 그냥 새카만 머리를 하고 왔답니다. 아니 왜, 20대면 원래 검은색 아니냐고요. 물론 그게 정상이죠. 하지만 아들은 1/4 정도가 흰머리입니다. 세상에 10대부터 새치가 나더라니까요. 그러더니 점점 늘어 급기야 염색을 해야 할 정도로 많아졌어요. 볼 때마다 제 맘이 어떻겠어요. 남의 아들이라도 속상하시죠. 하지만 누굴 탓하겠어요? 다 제가 물려준 유전자의 힘이죠.


저 역시 10대부터 새치가 수북했거든요. 30대부터 본격적인 염색을 시작했으니 염색 경력 30년이 다 돼가네요. 태권도를 그만큼 했으면 유단자가 됐을 테고 바둑을 두었으면 프로기사쯤 됐으려나, 뭐가 돼도 됐을 시간이죠. 그럼 저는 뭐가 됐을까요. 혹시 염색의 달인. 그럴 리가요. 염색 한번 할라치면 아직도 온 사방에 덕지덕지 발라서 보기에도 숭한 꼴이에요. 염색 경력 30년에 남은 건 줄어든 머리숱. 푸석푸석한 머릿결. 마치 겨울바람 속에 서 있는 정전기 난 개털꼴이에요. 이러니 제가 아들의 머리카락만 보면 어째 한숨이 나오지 않겠어요.



“제 머릿결 이전보다 좀 덜 곱슬거리지 않아요?”

아들의 두 번째 말입니다. 이전에 파마를 했었나 보다 생각하셨죠. 하긴 했죠. 매직 파마.

아들은 곱슬머리입니다. 곱슬도 곱슬 나름이에요. 여자든 남자든 정말 자연스럽게 곱슬 거려서 보기 좋은 사람 여럿 봤거든요. 흑흑흑. 하지만 제 아들은 악성 곱슬이에요.

철 수세미 아시죠. 억세고 뻣뻣하기가 마치 그것 같아요.

어릴 땐 그렇지 않았어요. 중학교 들어가서부터 나타나더니 고등학교 가선 점점 심해져 대학교에선 정점으로 치닫더군요. 학교 가기 전 머리 손질하는 시간이 한 시간 가까이 걸렸어요. 고 3 때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속에 천불이 나더군요. 달려들어 머리를 빡빡 밀어 버리고 싶었어요.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매직 파마를 해 주었지요. 자식 이기는 부모 있나요.

곱슬도 유전이냐고요? 그렇긴 한데 좀 억울해요. 미용실에선 절더러 반곱슬이라더군요. 문제는 남편도 반곱슬이라는 거죠. 반곱슬 둘이 만나 악성 하나를 완성했네요.


제가 젊을 적 부러웠던 것 중 하나가 긴 생머리였답니다. 찰랑찰랑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짝 나부낄 때 은은하게 퍼지는 샴푸 향. 너무 매혹적이지 않나요. 혹시 알아요. 제가 20대에 그랬다면 지금 제 옆에 딴 사람이 앉아 있을지도 모르죠.

아들의 미쳐 날뛰던 호르몬이 안정기에 접어들었는지 다행히 곱슬기도 좀 가라앉고 있네요.



“머리카락도 요즘 좀 덜 빠지는 것 같아요.”

세 번째 내뱉은 말입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냐고요? 덩치는 산 만한 게 누굴 닮아서 예민한 건지(혹시 나?) 스트레스받으면 머리칼이 찬바람에 낙엽 지듯 우수수 빠져요. 문제는 친가, 외가 모두 대머리 유전인자가 있다는 거죠. 앞이마가 점점 훤해져 가는 남편 머리 보는 것도 심란한데 아들까지 그러면 전 어쩌란 말입니까? 좋다는 샴푸에 이것저것 들이 밀었더니 효과가 좀 있나봐요.


아들에게 새치, 곱슬, 대머리 3종 세트를 물려주었으니 입이 열 개 라도 할 말이 없네요. 쓰다 보니 후회막급입니다. 아들에게 비밀로 해야 겠어요. 이 정도로 제 아들놈 혼삿길 막히지는 않겠죠.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것보단 상태가 양호하답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A/S도 가능하고요.



3종세트야 속상하지만 이미 엎지르진 물이니 어떡하겠어요. 근데 쓸만한 유산도 주었지요. 재산이 많으냐구요. 에이 어디 경제적 유산만 있나요. 부모 모두 건전한 정신에 적어도 남에게 손가락질당할 일은 안 하니 그것도 배울 바가 되겠지요. 그 정도로 부족하다고요. 그럼 책임감과 공감 능력 추가할게요. 아들이 하는 행동을 보니 그것도 꽤 넉넉하더라고요. 그 외에도 있지만 제 자랑 같아서 그만할게요. 물려받은 유산 앞으로 점점 불려 나가면 한 세상 사는 데 크게 지장 있을 것 같진 않아요. 이 정도 유산이면 괜찮지 않나요.

생색까진 못 내겠고 슬쩍 새치, 곱슬머리, 대머리 3종 세트랑 퉁치자고 해야겠어요.




사진출처: 픽사베이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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