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엘에게 07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등 Jan 31. 2024

'통화할 수 없습니다.'

'통화할 수 없습니다.'

'통화

'통화할 수 없습니다.'

자꾸 같은 말만 되풀이합니다.


L


나는 매물도 산 정상에 있습니다.

키 작고 다부진 소나무 그늘 아래 

이온음료 하나 옆에 두고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통화가 안 되는 곳이라니

바람 탓이라 생각했습니다만

어쩌면,

아니 역시 바람 탓입니다.

어째서, 왜?라고 물으려 여기에 온 것은 아니지만

단절은 오히려 집착을 만들어

멀리 돌아가는 배 꽁무니에서도

통화할 수 없는 이유를 찾고 있습니다.


매물도는 구석구석 기품 있고 신비롭습니다.

사진으로 봤던 그대로입니다.

종일 오락가락하던 비도 멈추고

구름 사이 비친 해 주위로 동그란 무지개가 떴습니다.


L


섬은 치맛자락을 들어 바닷물 깊이 내려갑니다.

섬과 바다가 엉겨 붙어 있는 동안에 벌어지는 하얀 포말을 보며

나는 갑자기 서글퍼져서

사랑은 물러선 뒤에야 

그 깊이를 알게 된다는 걸 받아 적어 봅니다.

그러나 여전히 통화할 수 없는 이유는 알지 못합니다.


매물도는 골짜기가 없습니다. 매듭이 없습니다.

섬은 하늘을 바라보고

바다를 바라보고

섬은 오가는 뱃사람을 바라보고

뭍으로 가는 손님을 바라보다가

신이 나를 바라보는 방법으로

내 몸이 나를 믿는 방법으로 

한발 물러서 나를 바라봅니다.

나는 매물도 정상에 앉아 

여전히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주는

'통화할 수 없습니다.'를 연거푸 듣고 있는 중이었습니다만,



                                                 - 매물도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