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엘에게 09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등 Feb 06. 2024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L , 


요즘 들어 자주 마음을 내다 널었습니다. 

훌훌 털어야 할 인연이 있었습니다.

인연법을 저는 모릅니다. 인연에 법칙이 있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거든요.

인연의 다른 말은 그리움, 소망, 욕망이며

배신이며 상처이며 …… 불손한 그것들을 연결하는 꼭짓점 어디에 인연이 있지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그것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해도 그러려니 하겠습니다.

마음을 내다 널은 자리에 앉아 햇살을 받으면

과거 먼 어느 날의 따뜻함이 고개를 끄덕여줍니다.


L ,


그녀들과 만어산에 올랐습니다. 

아시다시피 나의 차는 이제 늙었습니다. 

그래도 고불고불 정산까지 충직하게 올랐습니다. 

-저 산 위로 가면 강이 있다.- 

그녀가 말했습니다. 

-만 마리의 물고기가 산봉우리를 향하여 절하고 있다.- 

덧붙였습니다. 

산 아래 어스름 보이는 낙동강을 가리키며 

-강은 저 산 위로 흐른다.- 

배시시 그녀들의 웃음기가 보였지만, 순진한 나는 그저 설레기만 했습니다. 


강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들이 있다더니 

산봉우리까지 올라와 호수를 이루는 강이 있구나.

강이 있으니 물고기가 오르는구나 

산바람에 잔걸음 치는 물결을 벌써 보는 듯했습니다. 


L ,


한동안 나는 분노와 설움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슬픔이란 무게는 그 뒤에 왔습니다. 

내리는 햇살조차 돌팔매질 같아 가슴이 아팠던 날이 있었습니다.

그런 날이면 강으로 나갔습니다. 

흐르는 것들을 바라보다. 

바람처럼 새처럼 저벅저벅 날갯짓하며 물길을 거슬러 오르고 싶었습니다.


그러니 그녀들의 이야기에 나는 홀딱 빠져

늙은 차를 재촉한 것입니다.

산 위에 강이 있고, 팔딱이는 물고기가 만 마리, 

만어산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을 믿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렇습니다. 

흐르는 것은 물과 세월뿐이었습니다. 

강바닥의 모래도 쌓여만 가고 

산그늘도  길어지고

연약한 둥지도 흔적을 버리지 않는데 

오직 흘러가는 것만을 보는 탓에 설움이 깊었습니다. 


산에 오르고 나서야 보았습니다. 

모든 흘러갈 것을 다 흘려보낸 뒤에 

무엇이 우리들 가슴에 남게 되는지를 

제각각 모양의 만 마리 물고기들은 

무념무상 하늘을 우러러 돌로 남았습니다. 

돌로 돌을 치니 

비리고 비린 속세의 물결이 용솟음칩니다.


L ,


꿈인 듯 

갑자기 푸른 물결이 덮쳐와 

이 산과 저 산 사이 굽이쳐 강을 이루더니 

홀연 안개처럼 흘러가고 

그윽한 햇살이 다시 돌이 된 물고기 등 위를 어르며 

"무엇이 남았는가 보아라." 합니다. 

문득 정신이 들어 ‘여기 길이 남았구나’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환히 웃자, 그녀들도 덩달아 웃었습니다. 

우리도 남았구나. 다시 중얼거리자

그녀들이 합장을 합니다.



                                        -만어사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