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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엘에게 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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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등 Mar 13. 2024

행복을 꿈꾸며

L


당신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 놓다 잠이 들던 날은

행복한 꿈을 꾸었습니다.

작은 물고기가 되어 헤엄을 치다가

작은 새가 되어 날기도 하다가

병아리가 되어 뛰다가, 토끼가 되어 풀을 먹다가

꼬리 치는 강아지가 되어 뱅글거립니다.

이쯤이면 당신, 개꿈이라 웃으시겠지만
빽빽하게 일기를 적던 날이면
나는 이런 꿈을 꾸곤 합니다.

꿈을 꾼 다음 날이면 길을 떠납니다.
바람을 타고 가는 자유로운 깃털
가만히 내려앉는 붉은 잎 구멍 속
빵빵거리며 지나가는 번호판
백미러로 역광 하는 빛
이정표
그 모든 속에서 동행하는 당신을 발견합니다.
여전히 행복한 꿈 속처럼.


L


곰소젓갈 시장에 다녀왔습니다.
소금에 절여진 푸른 생선 등지느러미를 봅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반드시 흔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다를 잘 걸러내고 꼭 짜고 나면
반짝이는 소금과
아집도 없이 엉킨 내장 정도 남지 않겠습니까.

잘 익은 젓갈 속에는
바다의 흔적이 녹아져
더 큰 이상의 바다가 넘실거렸습니다. 

나는 바다 한 종지를 샀습니다.
비린내 따라 오징어 떼 쉴 새 없이 가슴속까지 몰아쳐 옵니다.

L


당신과 나도 곰삭은 젓갈로 한 드럼통 자리하고 있을 날 있을까요?
소금만으로도 복잡한 속 다 녹여낼 수 있을까요?
정신은 싱싱하게 남아 이 생을 노닥거릴 수 있을까요?
한 세월 어둠에 갇히고 나면
뽐낼 것도 없는 욕심 다 버리고
당신과 나 빛깔 좋은 사랑의 흔적만 고스란히 남겨 두게 될까요?

흰 접시 위에 붉은 젓갈을 놓아
당신의 아침 밥상을 차려보고 싶습니다.
미역 한 줄기 불려 홍합을 넣고 미역국을 끓여
마주 앉아 언짢은 당신 속을 풀어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속상합니다.
아직도 너무 파릇하고 꼿꼿한 내 속이 아파요
어느 세월 당신의 입맛을 돋우는 나긋한 내가 되어 본답니까.
오늘 밤에 또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꿈은 또 행복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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