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부모?
'부모교육'을 강의하러 다닐 때 흘깃 스치고 지나가는데 버스정류장 유리창에 붙어있던 글자가 ‘아이를 위하는 부모는 있어도 아이를 아는 부모는 없다’. 아이를 제대로 위하자고 집단상담과 강의하러 다니는 데 저건 뭐지. 방망이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유치원 가기 전에는 물건을 주거나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하나, 둘, 셋... 을 가르치고, 학교 다닐 때는 ‘엄마 노트’라고 만들며 소통하려고 애썼다. 방학 때는 ‘방학 생활’ 책 말고도 지리부도 책을 구해서 스케치북에 세계 여러 국가에 대한 인구, 국기, 넓이 등을 오려 붙이기도 하고, 큰 모조지에 세계지도를 그렸다. 88년 올림픽 이후에 외국 여행이 자유로워졌지만 많지 않았다. 그래서 세계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 손으로 직접 그리고 오리고 붙였던 것이다. 사진 찍어 붙인 견학기록문도 만들며 방학 때마다 필름 몇 통씩 현상하며 과제를 10여 개 만들어서 보냈다. 그게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인 나의 욕심인 줄 애들이 커서야 알았다. 그래도 잘 따라준 것이 고맙다. 거실에 펼쳐놓고...... 미술시간이었다.
‘어머니’의 존재는 ‘신이 바빠서 대신 보내는 사람’이라고 한다. 아동학대로 인해 아이들이 목숨을 잃을 때 여론은 <부모 자격증>이 필요하다. < 부모 자격증>에 관한 여러 책 들이 나와 있을 정도다. 준비도 되지 않고 엄마가 되기도 하고, 엄마 혼자 아이를 낳고 아빠는 얼굴도 내밀지 않는, 책임감은 제로인 경우도 있다. 강의나 상담에 도움이 될까 싶어 <고등학생 엄빠>를 10여 편을 보다가 내가 감당이 안 되어 보다가 중단했다.
큰딸이 대학교 1학년 때 ‘내가 원하는 것만 해줘’ 그때 어안이 벙벙했다.
‘해달라는 것만 해달라고?’
내가 해주고싶어 해 주는 것이 성가시기만 하고 도움이 안 되는 것인 줄 몰랐다.
결과론적으로 ‘아이를 위하는 부모’도 ‘아이를 아는 부모’도 아니었던 것이다.
‘열심히 사는 것’ 보다 ‘잘 사는 것’이 좋은 것인 줄 몰랐다. 열심히 살면 잘 사는 것인 줄 알았다.
작은딸이 엄마는 딸 둘을 30년 넘게 키우고도 우리를 왜! 몰라~~
딸들이 직장에서 자기 몫을 하고, 건강한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해야지. 나의 오답 노트는 계속된다. 나의 실패를 거울삼아, 공부한 것을 전문성으로 명명하며 내담자들에게 '부모교육'도' 가족 상담'도 한다. 살아온 세월을 연륜이라 하며, 오늘도 4시간 동안 ‘이야기 치료’ 교육을 받으며 12월 마무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