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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아 Sep 28. 2016

15살의 용기, 세상 밖으로

미국땅에 홀로서기

                                                                                                                      

"손님여러분우리 비행기는 곧 댈러스 포트워스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2006년 1월 14일, 만 열 다섯 살의 나이로 미국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인생이 통째로 바뀌기 시작한 날이다. 프로그램 시작 전,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참가 학생 모두가 텍사스의 댈러스에 모였다. 열 두 시간의 비행은 설레는 마음과 주변 친구들과의 수다로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제 집을 떠났다는 사실과 일 년 동안 가족들을 보지 못한다는 슬픈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중학생 시절, 방학 중 영어권 국가로 한 달 정도 다녀오는 어학연수가 붐이었다. 소위 부잣집 자녀들이나 공부 좀 한다는 상위권 친구들은 방학 때 미국어학연수를 다녀오곤 했다. 우리 엄마는 내가 더 넓은 곳에서 많이 보고 배우길 바라셨기에 어학연수를 이따금씩 권하곤 하셨지만 싫다는 대답만 했었다. 그 당시엔 다른 나라에서 산다는 게 썩 끌리지 않았다.
  얼마 후, 다른 10대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질풍노도의 시기가 왔고, 그와 동시에 학교에서 나와 관련 없는 일로 불편한 상황에 말려들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미국의 학교생활은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머릿속 저 뒤편에 있던 엄마가 지나치듯 권한 어학연수가 떠올랐다. 그날, 인터넷에서 미국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교환학생 프로그램이라는 것은 1년 동안만 공립학교를 다닐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 이후에도 원하면 비자를 새로 받아 사립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바로 이거였다!

엄마나 미국에서 고등학교 다닐래.”
갑자기 왜가라고 할 땐 안 간다더니.”
그냥미국에서 고등학교 다니고 싶어교환학생으로 가면 1년 동안 공립학교 다닐 수 있고 그 이후에는 사립학교 다니면 된대만 16살부터 갈 수 있다고 하는데 9월에 학기가 시작 되니까 이번 가을에 갈래.”
   
엄마는 항상 당신의 못다 이룬 유학의 꿈에 아쉬움을 갖고 계셨고, 그래서 내 유학을 적극 밀어주셨다. 나대신 아빠를 설득하셨고 나와 함께 유학원에 상담을 받으러 가주셨다. 한국 학교생활에 지칠 대로 지쳐있던 나는 빨리 미국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가고 싶었다. 정말로 떠난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터질 듯이 뛰어, 당장이라도 짐을 싸서 떠나고 싶었다. 하나씩 준비를 하며 유학원에서 상담을 받고 시험도 보았다. 준비가 거의 다 되었을 때, 상담하던 직원이 내 생일을 물었다.
     
"9월 3일이요.”
그럼 올해는 못 가시겠는데요.”
왜요!? 어차피 9월에 학기가 시작되잖아요그 때 16살이면 되는거 아닌가요?”
“9월이 시작이라 8월엔 준비해서 출국을 하셔야 됩니다만 16세부터 비자를 받을 수 있는 거예요비자를 받는 날을 기준으로 나이가 안 되면 비자를 받으실 수가 없어요.”
그럼 다른 방법 없어요?”
죄송하지만 다음 1월 까지 기다리셔야 되요.”
   
  기대를 안했으면 모를까. 이미 나의 중학교 3학년 2학기는 미국이라는 신세계에서 마음껏 뛰어다니며 엄청난 학교생활을 즐기게 될 것이라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무너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 안,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나왔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게 속상해 속으로 생일만 탓하고 있었다.
     
‘생일이 조금만 빨랐으면 갈 수 있었을 텐데, 왜 내 생일은 9월인 거야….’
   
엄마가 너를 괜히 9월에 낳았다좋은 때에 낳는다는 것이 이렇게 될 줄 몰랐네미안해.”
  
  순간, 생일 탓을 하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엄마의 미안한 마음에 내가 더 죄송했다. 한 학기 늦게 가는 만큼 더 많이 준비하고 가면 되는 건데, 당장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나는 바꿀 수 없는 일에 투정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예상보다 늦춰진 출국 일을 불평하는 대신 그 시간 동안 더 철저한 준비를 하기로 했다.
     
  어떻게 갈까 싶던 시간은 생각보다 금방 흘러갔다. 나는 3학년 2학기를 마치고 졸업식을 한 달 앞둔 채 가방을 싸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32인치 캐리어 두 개에 넘칠 듯이 담은 내 살림살이는 총 무게가 60키로가 넘었다. 나 자신보다 무거운 짐을 끌고 다니는 인생이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이라 뭐가 필요할지 몰라서 내가 자주 쓰는 물건은 여유분까지 다 챙겨갔다. 한국음식은 단 하나도 챙기지 않았지만 옷이란 옷은 다 챙겼다. 내 방을 그대로 압축시켜서 넣었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안 가져간 게 없었다. 필요한 것은 바로바로 꺼내 써야하는 성격 때문에 ‘가서 사지 뭐’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가방의 무게가 설렘의 무게였던 것 같다.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는 미국생활을 빨리 시작하고 싶은 마음으로 물건을 하나하나 정성들여 챙겼다.
  드디어 대망의 출국. 마냥 좋기만 했던 나는 여행가는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굳이 비교하자면 수학여행 가는 기분이었다. 가서 금방 돌아오는 그런 ‘여행’ 같았다. 그래서 엄마 아빠와 진하게 인사를 나눌 생각도 하지 못했고, 곧 돌아올 사람처럼 웃으며 비행기를 타러 갔다. 그땐 머나먼 타지에 딸을 홀로 보내는 부모님의 마음이 어떨까 생각하지 못했다. 철없는 딸내미는 그저 설레는 마음만 앞섰다. 
     
  사실 결정은 충동적이었다. 정확히 내가 왜 미국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무언가에 홀린 듯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정보를 찾으면 찾을수록 꼭 가고 싶다는 열망이 불타올랐다. 그걸로 충분했다. 더 이상 재고 따질 필요가 없었다. 그 당시 수줍음 많았던 나에게 내 가슴이 뛰는 일, 그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는 사실이 지금도 신기하고 감사하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미국은 어떨까? 우리랑 많이 다를 텐데…’, ‘가족이랑 떨어져서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들로 나 스스로를 불안하게 했다면 아마 가지 못했을 것이다. 가끔 사람들에게 15살에 혼자 미국에 간 이야기를 해주면 정말 용감하다고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렸냐고 들 한다. 그 당시에 나는 주변에 교환학생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나는 단순히 ‘하고 싶어서’했던 일이었기에 그 결정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깨닫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건 내 인생에 가장 용기 있었던 도전이었고, 가장 훌륭한 선택이었다. 충동적이었지만 그 한 번의 선택이 내 가치관과 신념을 확고하게 해주었고, 그걸로 내 인생이 통째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내가 어떤 결정을 할 때 기준으로 삼는 법칙이 있다. ‘하고 싶을 때 해야 한다는 법칙’이다. 어떤 일이든 꼭 해야 하는 시기가 있다. 바로 ‘내가 가장 하고 싶을 때’이다. 나에게도 그 ‘시기’가 왔고, 기회를 잡았다. 
  2006년 1월, 나는 인생의 번지점프대에서 뛰어내리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번지점프를 할 때 가장 중요한건 아래를 보지 않는 것이다. 발밑의 찰랑거리는 물을 보는 순간, 내 몸에 묶여있는 와이어를 믿고 의지하기보단 그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다는 두려움에 점프를 망설이기 때문이다.
  나는 타지에 혼자 가서 해내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을 하지 않았다. 영어에 자신감이 넘쳤고 무조건 행복하게 잘 살 것이라고 스스로를 믿었다. 나는 뛰어내리기 전에 발밑을 보지 않았다. 그랬기에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15살의 나는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이라는 번지점프를 즐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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