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
첫 미국인 가족은 우리 부모님과 비슷한 연배의 부부, 나보다 어린 입양 딸 한 명, 그리고 10년 넘게 키운 가족 같은 애완견 한 마리였다. 나는 그 집 딸 ‘앤지(Angie)'와 친자매처럼 지내고 싶었고 당연히 한 집에 사니 그렇게 될 줄 알았다.
내가 도착한 시간은 토요일 밤이었고, 다음날이 교회에 가는 일요일이었다. 무교였던 나는 교회 예배에 제대로 참석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가족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나는 자연스럽게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교회에 가면 그나마 가까이 사는 다른 한국인 교환학생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힘든 일도 이야기하고 일주일 간 있었던 일을 나누며 서로를 위로 해주고 위로 받는 유학생활의 단비 같은 시간이었다. 교회는 일요일 한 번, 수요일 청년 예배 한 번으로 일주일에 두 번 갔다. 수요일은 옷을 자유롭게 입어도 상관이 없었지만 일요일엔 격식을 차려 입는 게 예의였다. 나는 그걸 몰랐다. 아무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기에 항상 편하게 입고 다녔다.
내가 ‘mom’이라고 불렀던 호스트 아주머니는 초등학교 영어 교사였는데 식사 후 항상 나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내가 영어연습을 하도록 해주었다. 하루는 지나가는 듯한 이야기로 “앤지가 왜 자기는 교회 갈 때 꼭 치마 입으라고 하면서 한나가 청바지 입고 가는 건 뭐라고 안하냐고 하더라.”는 말을 했다. 생각해보니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차려 입고 왔지만 그때까지 만해도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교회 갈 때 치마 입어야 되요!?"
당황해서 물으니 호스트 맘은 인자하게 웃으며 괜찮다고 말한다.
“우린 앤지한테 치마를 입으라고 해. 꼭 치마라기보다 단정하게 차려 입으라는 거야. 기독교인으로서 예의를 갖추는 것이지. 하지만 한나에겐 굳이 강요하지 않을게. 네가 편한 대로 하면 되."
“아…, 저는 몰랐어요. 알았다면 저도 예의를 갖췄을 텐데…. 이젠 그렇게 입을게요!"
대화가 끝나고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왜 나에게 치마를 입으라는 말을 해주지 않았을까.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말했기 때문에 강요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그런 배려의 마음은 감사했다. 하지만 앤지의 질투를 사게 되었다. 어쩐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그리 살갑지는 않았다. 내 뒤에서 그런 이야기가 오갔다는 것도 조금 서운했다. 나는 이들과 이런 이야기를 편하게 나눌 수 있는 관계이길 바랐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들과 나 사이에 벽이 생겨버린 기분이었다.
호스트 맘은 ‘~하더라.’고 별 뜻 없이 이야기 했을지 몰라도 나에겐 많은 의문과 걱정거리를 남겼다. 만약 내가 실수하거나 이들 문화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부분이 있으면 몰라서 그런 것이니 알려달라고 말을 했다. 나 스스로도 주변을 더욱 주의 깊게 살피게 되었고, 내가 보는 모습과 닮아가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때부터 앤지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 친구도 입양된 딸이라, 나중에 들어온 내가 엄마아빠의 사랑을 뺏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나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앤지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라는 사실과 우리는 진짜 가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음이 아프지만 인정해야 했다. 그래서일까, 알게 모르게 집에서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하루는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인종차별을 당했다. 지금 같으면 장난을 장난으로 되받아치고 상처도 안 받을 가벼운 일이었는데 그 땐 처음이라 눈물부터 났다. 이 순간에 눈물을 흘리면 안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이제까지 쌓였던 긴장이 한순간에 쏟아져 나와 버렸다. 지금은 그 친구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저 장난기 가득한 표정만 기억날 뿐이다. 그만큼 가벼운 말이었지만 그때까지 누르고 있던 내 설움을 터뜨리기엔 충분했던 것이다. 학교에서도 항상 긴장을 하고 있어야 했고, 집에 가면 눈치를 보느라 편히 쉬지도 못해 곪아가던 속이 엉뚱한데서 터져버렸다.
그 날도 스쿨버스 제일 앞자리에 홀로 앉아오는 하교길이 어찌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한국에선 학교든 회사든 벗어나면 가서 편히 쉴 수 있는 집이 있었지만, 이 곳에선 그렇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편치 않은 여러 장소들을 계속해서 뺑뺑이 도는 기분이었다. 애써 괜찮다고 생각했던 앤지와의 미묘한 관계도 그리 좋아지는 것 같진 않았다. 아줌마가 나를 챙겨줄 때마다 질투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을 느꼈고 나는 마냥 좋다고 할 수가 없었다. 아줌마도 이걸 느끼셨는지 우리 둘 각각에게 더 많이 신경 쓰시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줌마도 가운데서 얼마나 고민이 많으셨을까 싶다.
하지만 무엇보다 지금 혼자라는 사실이 나를 많이 힘들게 했다. 힘든 날은 학교 끝나고 집에 와 울면서 끌어안을 엄마가 없다는 것이 가장 속상했다. 특히나 미국은 애정표현을 참 잘 하는 나라라 가족이든 연인이든 친구사이든 관계의 깊이는 애정표현으로 알 수 있을 정도로 표현이 진하다. 그래서 서로 사랑한다며 끌어안는 부모와 자식을 보면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삼켜야 했다.
‘나도 우리 엄마 아빠 저렇게 안고 싶다….’
항상 힘든 학교였지만 유난히 힘들었던 날에는 그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행복해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내게는 얼마나 괴로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매일 밤 기도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엎드려서 엉엉 울다보면 마음 놓고 울지도 못하는 서러움에 더 꺼이꺼이 울게 되었다. 그러면서 두 손 모아 기도했다.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우리 집 침대이게 해주세요. 제발 우리 집에서 눈 뜨게 해주세요.’
눈을 뜨면 사랑하는 우리가족이 있는 한국 집이길, 엄마가 나를 깨워주길 상상하고 간절히 기도했다. 몇날 며칠을 그렇게 울다 지쳐 잠에 들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날 정도로 간절했다. 혼자 감당하기에 벅찬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아침에 눈을 떴는데, ‘여기가 어디지?’ 하고 생각을 해야 했다. 너무나 생생하게 상상해서 순간 헷갈렸던 것이다. 하지만 이내 한숨을 푹 쉬며 다시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하루는 엄마에게 울면서 전화를 했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힘들면 3월 입학식 전에 돌아와. 어차피 그래도 친구들하고 같이 고등학교 입학하는 거잖아. 그리고 언제나 힘들면 돌아올 곳이 있다는 걸 잊지 마. 우리 딸, 힘내.”
그 말을 듣는데 눈물이 왈칵 났다. 이렇게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엄마의 말을 들으니 절대 돌아가지 않고 꼭 잘 해내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돌아갈 곳이 있어서 든든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첫 한 달은 많이 힘들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적응하는 것 보다 내가 혼자 감당해야하는 일들을 헤쳐 나갈 때 겪는 외로움과 설움에 적응을 하는 시간이었다. 한 달 쯤 지나니 외로운 것도 익숙해졌고 서러운 일을 당하는 것에도 덤덤해졌다. 괴롭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런 일들에 더 이상 눈물 흘리지 않게 된 것 뿐이다. 내가 아무리 서럽게 울면서 시간이 멈추길 간절히 바라도 내일은 온다. 어쨌든 오게 될 내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내 몫이었다. 그 마음가짐이 달라지고 있던 나는, 매일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