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쉽게 좌절하지 말자
대학원 시절, 우리학교엔 중국인 학생이 굉장히 많았다. 요즘은 어딜 가나 많지만 이 학교에는 특히나 많았다. 그런데 석사과정을 밟는 친구들 중에서도 생각보다 영어를 못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어떻게 대학원에 입학을 했나 싶을 정도로 말이 어눌한 학생들이 많았다.
나는 조금 먼저 와서 이 도시에 적응하고 싶었기에 학기 시작 전 3주 어학 과정을 신청했다. 그 3주 동안 친구들도 사귀고 다양한 경험도 하고 영국이란 나라에 대해서도 좀 알아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약 한 달 동안 지냈던 기숙사는 10명이 함께 사는 곳이었다. 10인실이 아닌, 열 명이 각방을 쓰며 화장실과 부엌을 공용으로 쓰는 형태였다. 내가 도착했을 때 나를 제외한 다른 친구들은 10주 과정을 이미 진행하고 있었다. 내가 중간에 들어왔지만 나에게 정말 친절했고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그들은 착해서 친해지기는 쉬웠지만 말을 알아듣기가 어려워 대화가 힘든 경우가 종종 있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계중에 영어를 못해도 과제나 논문을 돈 주고 맡겨서 학위를 ‘사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초반엔 중국인 유학생들에 대해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학기가 시작되고 본격적으로 학술지와 논문을 읽어야 했을 때, 이건 영어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생전 접해보지 못한 전문용어들과 사전으로 검색해도 찾을 수 없는 뜻의 단어들이 나를 혼란에 빠지게 했다. 사전을 열심히 뒤져서 나름대로의 해석을 해도 이게 맞는 건지 아닌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도 답답했고 무엇보다 스스로의 실력에 실망 아닌 실망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간을 더 많이 투자했고, 아침 일찍 도서관에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서관에 일찍 가면 비슷한 시간에 와서 비슷한 자리에 앉는 사람들이 있다. 청소부 팀원들과 함께 우중충한 맨체스터의 아침을 열었던 친구들이 몇 명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이 중국인이었다. 몇몇은 한두 번씩 보이기 시작하더니 언젠가부터 고정멤버가 되었다.
나는 스트레칭도 할 겸 자주 일어났는데, 그 친구들은 자리에 사람이 있나 싶어 쳐다보게 될 정도로 꼼짝 않고 공부를 했다. 감탄스러울 정도의 집중력을 갖고 앉아있는 중국인 학생들을 보며 내가 가지고 있던 그들에 대한 편견을 깨게 되었다. 물론 소문대로 돈으로 해결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겠지만 나와 같은 곳에서 공부했던 친구들은 엄청난 노력을 했고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나 또한 힘을 얻었다.
한두 번 마주치며 인사를 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친근감이 들었는지 몇몇은 중간 중간 식사하러 간다며 나에게 노트북 같은 중요한 짐을 맡기기도 했다. 그 때마다 환하게 웃으며 부탁을 했지만 말이 유창했던 친구는 거의 없었다. 그랬기에 열심히 하는 그 모습이 더 대단해 보였다. 그들과 나를 비교하며 우월의식을 갖거나 ‘내가 좀 더 낫네.’라는 생각을 한건 아니다. 그들에겐 이 과정이 얼마나 더 버거울까 생각을 하니 힘들다고 어렵다고 투덜댔던 내 모습이 오히려 부끄러웠다.
언젠가부터 그 친구들이 내 시야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안심이 되었다. 누가 안 오는 날에는 왜 안 왔을까 궁금해지고 안 보이는 기간이 길어지면 걱정도 되었다. 서로의 이름도 모르고 인사만 하던 사이였지만 같은 길을 가며 비슷한 난관을 헤쳐 간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서로의 존재가 큰 힘이 되었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힘들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런 날이 생각보다 참 많다. 아침에 일어나는 사소한 것부터 각자의 상황에서 갖는 큰 문제들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의욕을 저하시키는 날도 많다. 그럴 때 마다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 혹은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보면서 힘을 내본다.
다른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위안을 삼자는 말이 아니다. 나만 힘들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우울하게 하지 말자는 것이다. 누구나 다 겪는 일이고 나보다 더 힘든 일을 견뎌내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며 쉽게 좌절하지 말자는 것이다.
나만 힘들 것이라는 건 내 착각일 뿐이다. 나와 함께 가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 그리고 더 힘든 일도 견뎌내는 사람이 있다는 걸 기억한다.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은 순간 이 사실을 기억하고 끝까지 힘을 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