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걸 흔히 ‘멍 때린다’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은 우리사회에서 주로 부정적인 표현으로 사용된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비생산적으로 흘려보낸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에겐 일정한 멍 때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무슨 일이든 쉬어갈 줄 알아야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다. 컴퓨터도 너무 많은 프로그램을 계속 돌리다 보면 과부화가 걸려 멈춰버린다. 산에 오를 때도 숨이 가빠 힘들어질 때 쯤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그곳에서 잠시 쉬었다 가면 정상에 오르는 게 한 결 수월해진다. 그렇듯 우리 삶에도 내 마음을 정리하고 한 발 뒤에서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 같은 멍 때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영국에서 공부할 때 나의 정신적 지주이자 내가 멘토로 삼았던 T는 동기지만 나이도 경험도 나보다 한참 많았다. 덕분에 나는 학업 이외에도 많은 부분 배우고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였고 무슨 일이든 남보다 몇 배 이상 해내서 몸이 세 개인가 싶을 정도였다. 엄청난 양의 결과물을 보면 절대 쉬지 않고 항상 달리기만 하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기념일을 잘 챙겼다. 생일인 친구가 있는 날엔 함께 식사를 하자고 주도해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학업에서 벗어나 쉴 수 있게 해주었다.
언젠가는 내가 주말도 없이 도서관에서 사는걸 보곤 이런 말을 했다.
"이건 장기전이에요. 장기전은 잘 쉬어야 더 멀리 오래 달릴 수 있어요.
잘 쉬는 사람이 결국 더 멀리 갈 수 있어요. 쉬는 것도 중요해요."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조금만 게을러지면 흐름을 놓치고 뒤쳐질까 겁을 내고 있었다. 쉬어야 피로도 풀리고 충천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당시의 나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았다. 달릴 줄만 알았지 내 생활에 브레이크를 잡을 줄 몰랐던 것이다.
논문을 쓸 때 내 주제에 관해 계속해서 생각을 해야 했다. 온 정신을 집중했기에 잘 때까지도 그 끈을 놓지 못했다. 결국엔 불면증으로 이어졌고 잠을 제대로 못자니 당연히 건강이 많이 약해졌다. 그 때는 머리를 비우고 싶다는 생각보단 푹 자고 싶다는 생각에 맥주나 와인을 한 잔씩 하고 잠을 청하곤 했었다.
그러던 와중에 허리통증이 심해졌다. 병원에서는 허리와 고관절을 이어주는 뼈가 선천적으로 작아서 약하다고 했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어릴 때부터 무거운 짐을 많이 들고 다녀서인지, 오래 앉아있거나 무거운 물건을 들면 허리에 금방 무리가 간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부족한 부분을 채워 빨리 따라가고 싶은 마음에 하루에 17시간씩 앉아서 공부를 했다. 내가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드니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천천히 가면 뒤쳐질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그래서 매일 저녁 집에 오면 아픈 허리를 붙잡고, 심한 날은 진통제를 먹고 잠을 청했다.
어느 날 아침, 통증이 너무 심해 일어나지를 못했다.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온 몸으로 고통스러운 통증이 퍼져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를 누워있으면서 내 의지와 상관없는 휴식시간을 가졌다. 내가 주말에라도 쉬어가며 했더라면 그렇게 갑자기 아프진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일주일에 하루의 휴식조차도 허락하지 않아 몇 주의 시간을 잃어야 했다.
아직 세 학기 중 한 학기도 끝나지 않은 상태여서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쉴 땐 과감히 쉬자고 나와 약속을 했다. 내 허리와 뇌가 쉴 수 있는 시간을 주기로 하고 주말만은 꼭 쉬기로 했다. 주말 오전에 운동을 하고 오후에 카페에 가서 책을 쉬엄쉬엄 읽더라도 도서관엔 가지 않았다. 마지막 학기에 논문을 쓸 때는 하루에 10시간 이상 앉아있지 않았다. 아침에 일찍 시작하고 오후에는 몇 시가 되었든 10시간을 채우면 일단 집으로 돌아 왔다.
처음엔 오후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뭘 해야 할까 방황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취미를 계속 찾아갔고, 그렇게 학업 이외의 것으로 생각을 돌리는 시간을 늘려갔다. 일부러 의식적으로 ‘멍 때리기’를 실천했다. 일주일에 한 번 해가 뜰까 말까 한 곳이라 해가 쨍쨍하게 맑은 날이면 시내 공원에 나가 멍 때리며 사람구경을 했다. 커피 한 잔 들고 야외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길거리 구경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가 가지고 있던 고민과 걱정이 싹 걷히는 느낌이 들었고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러면 다시 집에 돌아와 운동이나 캘리그라피 등의 여가활동을 하며 머리를 비워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집중력이 향상돼 능률이 올랐다. 하루에 열일곱 시간씩 앉아있을 때 보다 단 시간에 더 좋은 결과물이 나왔고 몸 상태도 많이 좋아졌다.
요즘 사람들은 아무것도 안하는 시간이 거의 없다. 항상 손에는 스마트폰이 들려있고 SNS로 빠르게 전파되는 정보를 쉼 없이 수집한다. 정보 확산의 속도가 워낙 빠르다보니, 주변사람들이 다 아는 이야기를 나만 모르게 될까 불안한 마음이 사람들을 지배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핸드폰으로 새로운 소식을 받고, 이동하면서 버스와 지하철에서 끊임없이 정보를 보고 듣는다. 집에 돌아와서 잠들기 전까지도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우리는 스스로가 ‘멍 때리는 시간’을 갖지 못하게 하면서 뇌를 혹사시킨다. 너무 많은 정보를 구겨 넣으면서 뇌가 정보 소화불량에 고통 받는 신호를 무시한다. 잠시 그 끈을 놓으면 뒤쳐질까 불안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못 견디기 때문이다.
공부도 삶도 똑같다. 밥을 먹을 때 입에 적당량을 넣어야 맛있게 씹어 먹을 수 있다. 한 입에 너무 많이 넣으면 맛도 느끼지 못할뿐더러, 여유가 없어 씹을 수조차 없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다. 너무 앞만 보고 달리기 보단 때때로 잠시 멈춰 뒤를 돌아보고 나를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미리 중간점검을 해가며 내가 가는 방향이 옳은 방향인지, 얼마나 왔는지 확인하는 것도 앞을 보고 달리는 것만큼 중요하다. 멈추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멍 때리는 시간을 주기적으로 가져봐야 한다. 그러는 동안 자연스럽게 불필요한 것들이 비워지면서 새로운 것도 더 잘 흡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