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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아 Oct 30. 2016

모든 경험은 내 그릇에 담기

인정하는 순간 내공이 되고 여유가 된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어딜 가나 나에겐 문제가 따라왔다. 남들에게는 어쩌다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들이 나에게 몰려서 생기는 것 같아 늘 속상했다. 하지만 결국엔 모든 것이 나의 경험과 스토리가 되었다. 
 1년밖에 지내지 않았던 영국에서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본 과정 시작 전에 몇 주 동안 지낼 기숙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일이다. 방 열쇠를 받으러 갔는데 내가 도착한 뒤로 중국 학생들이 대거 도착했다. 조금 기다리니 열쇠 담당자가 와서 한 사람씩 이름이 써진 열쇠를 나눠주었다. 내가 제일 먼저 왔으니 일등으로 이름을 말했는데 아무리 뒤져도 내 이름이 적힌 봉투가 없는 것이다. 담당자는 일단은 기다려달라며 내 뒤에 온 사람들의 열쇠를 모두 나눠준 후 다시 찾기로 했다. 모두가 떠난 후 나는 담당자와 내 봉투를 찾아보았으나 없었다. 
 혹시나 싶어서 챙겨온 결재 화면 출력물과 결재 날짜를 보여주니 아무래도 누락이 된 것 같다며 일단은 ‘emergency room'으로 가라고 했다. 여긴 나처럼 누락된 사람이 있을 경우에 보내려고 비워놓은 가장 작은 방이었다. 그다지 듣기 좋은 이름도 아니었다. 
 ‘응급실? 이왕 해줄 거 특실로 해주지.’
 내 방이 누락되었다는 사실에 시작부터 학교에 서운한 마음이 생겼다. 처음에는 주말에만 이 방에 있다가 월요일에 다시 오면 내 방을 찾아 옮겨주겠다고 했다. 월요일에 아침 일찍 찾아갔더니 내일 오라고 미루고 그 다음날 가면 또 다음으로 미루다가 결국엔 그 방에 계속 있게 되었다. 금방이라도 옮겨줄 것처럼 말해 짐도 제대로 못 풀고 있었는데 질질 끌기만 했다. 일을 제대로 해결해 주지도 않는 직원들의 태도에 기분이 나빴지만 3주 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잘 지내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3주는 금방 갔다. 새로운 기숙사로 들어가는 날과 지금 기숙사의 퇴실일 사이에 며칠간의 공백이 있었다. 그 사이에 여행도 가고 한국인 언니 집에 며칠 신세도 지다가 드디어 내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개인 화장실을 가진 1인실에 내 짐을 옮기는 순간 너무 행복했다. 드디어 마음 놓고 짐도 풀 수 있는 내 방에 들어왔다는 사실에 너무 기쁜 나머지 방을 점검하지도 않고 짐만 던져놓은 채 쇼핑을 나갔다.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이불부터 그릇까지 모든 살림이 필요했다. 시내에서 행복한 쇼핑을 마치고 무거운 짐과 함께 집으로 돌아와 짐을 대충 풀고 손을 씻기 위해 물을 틀었는데, 물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나는 당황했지만 당황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당황하면 믿고 싶지 않은 이 사실이 현실이 될 것 같아 침착하게 사실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다시 한 번 수도꼭지를 닫았다가 열어봤다. 하지만 나오지 않았다. 

 ‘설마…, 아닐 거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변기 물을 내려 보았는데 핸들이 힘없이 돌아갔다. 그런데 샤워기를 트니 물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찰나, 바로 펄펄 끓는 물이 나왔다. 찬물은 안 나오고 뜨거운 물만 나오는 것이었다. 세면대도 다시 틀어보니 뜨거운 물만 나왔다. 차라리 찬물이 나오면 손도 씻고 세수도 하고 샤워도 할 텐데, 뜨거운 물은 거의 끓는 물 수준이어서 손을 갖다 댈 수도 없었다. 
 다행히 아직 전원 입실 전이어서 빈 옆방의 화장실을 쓸 수 있었다. 다음 날 직원에게 말을 했더니 지금 수리공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점심시간 이후에 가서 고쳐주겠다고 했다. 나는 방에서 기다리다가 볼일이 있어 밖에 나갔다 왔다. 어차피 내가 방에 없어도 고쳐놓고 가면 되는 것이기에 믿고 저녁까지 돌아다니다 왔다. 당연히 고쳐져 있을 거라 생각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대로인 것이다. 화가 났지만 다행히 아직 빈방이 있어 오늘은 또 다른 방에서 샤워를 했다. 그렇게 빈 방 화장실을 전전하는데 한 명 한 명 입실할 때마다 불안함은 더해갔다.
 내가 적극적으로 해달라고 말하지 않으면 기약이 없을 것 같아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해서 내 화장실부터 고쳐달라고 요구했다. 나중엔 내가 전화해 호수만 말해도 알고 있다며 고쳐주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전화할 때마다 ‘오늘 해줄게’를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지만 결국 4일이 지나서야 고쳐주었다. 
 수많은 방들이 있는데 왜 하필 내 방만, 그것도 찬물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처음엔 짜증도 났다. 한 번에 고쳐주지도 않아, 이것 때문에 몇 날 며칠을 신경 써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웃음이 났다. 물론 어이없는 웃음이었지만 어쨌든 나한테 일어난 일을 더 이상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결국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나를 더 강하게 해주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다. 

 같은 해외 생활을 했어도 나처럼 다이내믹한 일을 겪은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친구들에게 다 말해주려면 몇 날 밤을 새도 모자라다. 나는 첫 기숙사에서 ‘emergency room'에 머물게 됨으로써 그런 제도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방 10개 중 한 방은 다른 방들보다 더 좁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내가 그곳에 머물지 않았다면 모든 방이 다 같은 줄 알았을 것이다. 새 기숙사에서는 이사를 하면 제일 먼저 방부터 확인하고 문제가 있으면 당일 낮에 담당자에게 바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마냥 기다리기보단 조금 귀찮을 정도로 계속해서 요구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나다 보니 나 자신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처하는 순발력이 길러진 걸 발견했다. 하루는 전자레인지에 뭔가를 데우고 있는데 갑자기 전기가 나갔다. 딱히 전기를 많이 쓴 것도 아니라, 처음엔 전자레인지가 잘못되었나 했는데 냉장고를 열어보니 불이 들어오지 않았고 전등도 켜지지 않았다.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럼 그렇지! 대체 난 얼마나 특별하기에 이런 일만 몰고 다니나 몰라.’

 인터넷으로 고장 수리 신고를 하러 내 방으로 돌아가는데 눈앞에 뭔가가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본 내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바로 두꺼비집이었다! 열어보니 예상대로 부엌 스위치만 내려가 있었다. 뿌듯함에 미소를 지으며 다시 스위치를 올려놓았고 모든 것을 원상복귀 시킬 수 있었다. 
  처음엔 그 많은 사람들 중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나 싶어 속상하기도 했다. 나 혼자만 고군분투하는 그 상황에 짜증이 났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일들을 즐기기 시작했다. 지나고 나서 친구들에게 이야기해줄 거리가 하나씩 더 생겨 재밌기도 했고 스스로도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좋든 나쁘든 모든 일엔 이유가 있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도움이 된다.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나에게 짐이 될 수도, 힘이 될 수도 있다. 내가 그 순간에 ‘안 좋은 일이 하나 더 생겼구나.’ 생각하고 흘려보내 버렸다면 다음에 비슷한 일이 생겼을 때 ‘또 이런 일이 생겼어!’ 라며 화만 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경험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내 차곡차곡 담아 내 그릇을 키워갔다. 그리고 그것들이 나의 내공이 되어 나를 웬만한 일에는 당황하지 않고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작던 크던 내가 경험하는 모두가 다 내 것이 되어 알게 모르게 날 성장시켰다. 스쳐가는 듯 한 일들도 무의식중에 다 기억하고 담아두었더니 언젠가는 써먹을 일이 생겼다. 내 경험으로 누군가를 도와줄 수도 있었고, 내 삶이 더 편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이 많아져서 스스로의 답답함을 줄일 수 있었다. 내 그릇에 담은 경험들은 내가 모르는 새 숙성이 되어 내공이 되고 나를 더 여유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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