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시간에 미련갖지 않으며, 다가올 날을 준비하는 자세
여러 나라에서 살아보고 여행을 해보면서 나름의 노하우가 쌓였다고 생각했었다. 어디서든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자부하며 나는 사막에 떨어져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마주한 모든 문제들은 항상 새로웠다.
미국에서는 이제껏 서로 모르고 살아왔던 사람들과 한 집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한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경험을 했다. 하숙생인 듯 딸인 듯 맞춰가며 불편한 건 참고 서러워도 괜찮은 척 살아갔다.
스페인에서는 또래 학생들과 한 집에서 살았는데 그때는 상황이 또 달랐다. 이번엔 서로의 생활 패턴이 달라서 함께하는 게 힘들었다. 모두가 똑같이 월세를 내고 지내는 동등한 입장이었기에 내가 뭔가를 요구하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영국에서는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또 다른 불편함이 있었다. 어딜 가든 다른 나라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건 똑같은데 매번 다른 상황에서 다른 문제점들이 생긴다. 정말 신기하게도 내가 이제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싶으면 다른 난관들이 생긴다.
내공이 쌓일 만큼 쌓였다고 생각했는데 매번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니 아쉬움이 남을 때가 많았다. 가끔, 이쯤 되면 편해야 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왜 나에게는 가는데마다 문제가 생기고 예외의 상황이 발생하는 걸까. 나름의 내공을 쌓았는데 자꾸 예상치 못한 이변이 생기니 이 내공을 써먹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항상 스스로에게 후회 없는 삶을 살자고 한다. 그러기 위해 어떤 선택을 했을 때 그 선택을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한다. “최선을 다 했어야 했는데…”, “이걸 하지 말고 저걸 했어야 했는데…” 라는 말을 안 하려고 매 순간 내 마음이 가는 선택을 한다. 그래도 조금 더 잘 할 수 있었다는 아쉬움은 남기 마련이다.
얼마 전 「꽃보다 누나」라는 프로그램에서 배우 윤여정씨가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60세가 돼도 인생을 몰라요. 내가 처음 살아보는 거잖아. 나 67살 처음이야. 내가 알았으면 이렇게 안하지. 그냥 사는 거예요. 그래서 아쉬울 수밖에 없고 아플 수밖에 없고 계획을 할 수가 없어요.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하나씩 내려놓는 것, 포기하는 것, 나이 들면서 붙잡지 않는 거예요.”
아프지 않고 아쉽지 않는 인생이 어디 있냐는 인생선배의 말이 큰 위로가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감동을 받아 한동안 화제가 되었던 말이기도 하다. 내 인생만 아쉽고 아픈 것 같지만 모든 인생이 다 아프고 다 아쉽다.
아쉬운 인생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건 뒤돌아보며 과거에 묻히는 게 아닌, 앞을 보며 다가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잡았으면 최선을 다하는 것, 뒤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매일이 처음 만나는 ‘오늘’이다. 20대인 나에게도, 60대인 윤여정씨에게도 매일이 새로운 날이다. 그렇기 때문에 완벽하게 살아내지 못했음에 자책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여행할 때 매일매일 새로운 풍경, 환경, 언어, 문화 등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겪는 모든 일은 다 우리에게 처음인 일들이다. 여행을 할 때 매일 내일이 더 기대되는 것은 내일도 가보지 못한 새로운 곳을 가서 새로운 경험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행을 할 때 우리가 잘 하는 말이 있다.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오겠어.”라는 말과 “온 김에 다 보고 가자.”라는 말이다. 실제로 우리는 여행을 할 때 매일매일 최선을 다한다. 하나라도 더 보기위해 돌아다니고, 배가 불러도 그 지역의 대표음식을 맛보기 위해 일부러 찾아가서 먹어본다. 아무리 다리가 아파도 유명한 곳은 꼭 가보기 위해 노력한다.
이렇게 열심히 여행하는 이유는 이 시간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이 여행지를 나중에 다시 올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느낌을 그 때는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 이 곳에서 후회가 남지 않도록 둘러보지 않으면, 언제 그 아쉬움을 풀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지만 길을 잃고 헤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길을 잃는 것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처음 온 곳이고 익숙하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당연히 길을 잃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도 여행과 똑같지 않을까? 매일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같은 일을 하더라도 내 인생의 '오늘'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러니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하루를 보낼 수도 있고, 매번 하던 일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나만 아쉽고 나만 아픈게 아니라는 말을 기억하자. 우리 모두는 항상 처음 맞는 오늘을 보내고 있다.
처음이기 때문에 당연히 정답을 모른다. 어떤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60이 넘은 윤여정씨도 매일이 처음이라 예측할 수 없다지 않는가. 아직 너무나도 젊은 우리는 새로 맞는 매일이 불투명하고 지난 어제에 아쉬움이 남는 것이 당연하다. 매일이 처음 만나는 날이기에 항상 완벽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미 지나간 과거에 미련 갖지 않고 내려놓는 것, 다가올 앞날을 위해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