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은 젊은이에게 주기 너무 아깝다.
내가 이 말을 접했던 시점과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로 휩쓸었을 때가 비슷했던 듯하다. 대학교 4학년으로 올라갈 즈음이었는데, 그야말로 청춘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던 터라 책으로 위로를 많이 받았고, 동시에 저 말이 나에게 줬던 울림이 있었다.
“니 아빠도 늙어. 언제까지 청춘이겠니.”
서른이 다 되어서도 아빠랑 투닥거리는 나에게 아빠의 손위 누이인 고모가 전화 통화로 하셨던 말씀이었다. 내가 이때 “어휴, 저희 아빠는 여든까지도 청춘이실 것 같아요.”라고 답했지 싶다. 비단 아빠의 성정 때문만은 아니라 삶에 대한 열심을 내는 정도가 내가 부끄러울 정도였으니 말이다.
한편, 슈퍼 에이저(Super-Ager)라는 말을 최근 기사를 통해 봤다. 80세 이상인 사람들 중 뇌 나이가 20~30년 정도 젊게 유지되는 사람들을 말하는 용어인데, 실제 연령도 놀랍고 유지되는 뇌 나이의 갭도 커서 신기한 개념이구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내 주위에 그리 될 법한 사람들이 이미 제법 계셔서 한편으로는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다.
‘그 나이대에 맞게 사는 법’이라는 문구를 나는 꽤 자주 되뇐다. 그 나이대에 맞게 살고 싶어서이기도 하고, 그 나이대보다 과하게 살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나이대보다 더 이상으로 살고 싶어도 그러기 어려운 한계가 존재한다 싶은 때가 종종 있다. 이를테면 ‘사람 보는 눈’과 관련해서다.
어렸을 때 일찌감치 나에겐 창의력은 떨어지고 모방·학습 능력이 그보다는 낫다고 결론을 지었기에, 나는 주변을 유심히 살피는 편이었다. 사람에 대한 판단 능력을 갖추기까지 필요한 시간들을 물리적으로 다 갖추고 누군가를 만나기엔 어려울 것 같아서, 가까이는 부모님의 결혼 생활부터 멀리는 친구들의 결혼까지 지켜보며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이상적인가를 끊임없이 재왔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 이후 내가 미처 다 살피지 못한 것들을 발견할 때마다 왜 이것까진 생각을 못 했지, 왜 여기까진 못 봤지 하고 자책하게 된다. 물론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이런 건 나만 있는 일이 아닐뿐더러, 아직도 내 자신이 새로운데 상대방의 새로움을 발견하는 것이 뭐 그리 대수겠냐 싶기도 하다. 그래서 아무리 열심히 살펴도 보이지 않는 제한선이 있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고.
그래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 나이대에 맞게 산다는 것이 갖는 미덕이 무엇일까.
유명한 운동선수나 아역부터 시작해 유명한 배우가 된 이들의 인터뷰에서 공통적으로 나왔던 문구 중 이런 것이 있었다. “……하느라 학교생활을 잘 못했어요. 남들 다 가는 수학여행도 못 가보고, 학교 앞에서 떡볶이 먹는 것, 그런 일상을 못 해봤죠.” 그때만 할 수 있는 것, 지나가고 나서는 하고 싶어도 할 환경이 안 되거나 함께할 이들이 없는 것, 그게 바로 그 나이대라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다 큰 줄 알았던 10대, 치기 어렸던 20대, 거창하게 열었지만 깨깽하게 되는 일이 많은 30대를 지나 40대의 문턱에 있는 나는, 부모님이 이미 다녀가신 40·50대를 안다. 아는 만큼 좀 더 지혜롭게 그 시기를 보내고 싶지만 어쩐지 자신이 없는 건,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뿐만이 아니라 용기의 문제인 건가 싶기도 하다. 과거를 돌아보면 이미 들어 있는 나이건만, 미래를 바라보면 지금이 정말 젊다 싶기에. 불안을 내려놓고 용기를 집어 들고 현실을 살아갈 책임이 있는 것 같다. 어느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