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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by 영다정

작년 12월, 우리나라에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이 발생했다. 처음에 실시간으로 일어난 상황을 모르던 내가 인스타 스토리에서 마주한 내용은 현실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던 TV뉴스 화면이었다.


화면에는 많은 시민들이 계엄군과 대치한 모습과 함께 자막에 ‘계엄’이 선포되었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실제 상황이 맞나 싶어서 눈을 의심하고 내가 아는 그 단어의 의미 말고 다른 게 더 있나 싶어서 사전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런데 실화였고, 실제 상황이었다. 생중계되는 상황을 지켜보며 새벽까지 잠을 잘 수 없었고, 같은 상황이었던 지인들과 단톡방에서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며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사건 자체는 몇 시간 만에 일단락되었지만 한밤 중에 일어난 계엄 사태로 많은 사람들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아픈 과거를 떠올리기도 했고 너무나 갑자기 벌어진 사건으로 위협감과 함께 분노를 느끼기도 했다. 나 역시 평범한 일상에 뜻하지 않게 벌어진 사건이 처음엔 도대체 이게 지금 시대에 발생할 수 있는 일인지 황당했다가 뭐가 잘못돼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건가 싶고, 이런 상황에 나는 뭘 해야 할까 생각할 때 X(구 트위터)에서 아이돌 응원봉을 들고 행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이때 그들을 행동하게 만든 건 어떤 엄청난 정치적 움직임의 영향 때문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걱정 없이 좋아하게 할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스스로 움직인 작은 힘이 모인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치에 소극적인 편이지만 응원봉을 든 여성들을 보며 나도 행동할 용기를 얻었다.


그 주 주말, 친구들과 함께 국회로 향했다. 6시에 시작되는 집회였는데, 이미 2, 3시에 사람들은 움직이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여의도로 모이고 있었다. 영등포에서 국회 앞까지 걸어서 도착하는 데에도 2시간쯤 넘게 걸린 것 같다. 곳곳에 시위 슬로건과, 물, 핫팩 등을 나누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목소리를 보탰다. 국회 앞뿐만 아니라 여의도 공원을 따라 걸어가는데, 대로에 빼곡하게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 있었다. 언제까지 시위를 하게 될지 모르지만 12월 한 겨울 추위에서 자리를 지키고,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보며 나도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이전의 시위와 크게 달랐던 점은 아이돌 응원봉을 든, 2030 젊은 여성들의 참여가 크게 늘었다는 점이었다. X에서 어떤 분이, 아이돌팬이 시위에 최적화된 이유에 대해 추운 날 콘서트 대기 경험과, 꺼지지 않는 촛불 응원봉, 단련된 떼창, 연대의식이라고 적은 글을 보고 공감하기도 했다. 아이돌 팬이 많았다 보니 집회에는 기존 민중가요뿐 아니라 최신 아이돌 노래도 울려 퍼졌다. 어떤 날엔 응원봉과 팬덤을 소개하는 시간을 따로 가지기도 했다고 하고, 어떤 분들은 주변 상점에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이름으로 간식, 식사류, 음료 등을 선결제하여 집회 참여하신 분들에게 기부하는 방식으로 응원을 보태기도 했다. 이게 응원을 보태는 방법이라면, 같은 마음을 가지고 응원을 보내는 것이라면 어떤 응원봉이든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다음 집회 참여할 때 나도 내가 가진 응원봉을 들고 참여하기도 했다.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직후 12월 14일에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울려 퍼졌다. 노래와 함께 국회 앞을 가득 채운 응원봉이 모여서 만든 연대가 빛을 밝힌 순간이었다. 응원봉은 LED이지만 촛불의 뜨거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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