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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치 Sep 13. 2021

[어느 주말] 2. 줄어든 옷

2. 빛 바랜 나의 첫사랑


이제는 빛 바랜 첫사랑의 기억이다.


밤이 어수룩해지고 초승달이 누렇게 올라올 때 쯤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었지.



얘기가 통하지 않아도, 걷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그 때




"미안해. 잘못했어. 아직도 화났어?"


"어. 어. 아니. [...] 근데, 너가 뭘 잘못한진 알아?"


"아까 낮에. 너무 내 마음대로 한 거."


.... 우리, 그만하자....


아니, 생각할 시간을 좀 갖자...




아무리 길어도, 해가 들어갈 때 쯤이면 그래도 기분이 풀릴 줄 알았다. 매번 그 시간은 길어졌다. 처음에는 손을 잡으면서 눈을 맞추는 것으로 자신도 모르게 녹아버린다고 했다. 그거면 됐다고 했다. 그러다가 종종 집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실마리가 엉켜있는 때면, 내가 버스를 잡아서 기사님께 인사를 드리고 손잡이를 잡는 순간, 그 순간에 전화가 왔다. 


잘 탔어?


나는 재미없는데 그는 재미있고, 그는 재미없는데 나는 재미있는 순간이 쌓여오면서, 우린 점점 알게 됐다. 우리는 참 다른 사람이란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손을 잡았고, 그의 팔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고, 그의 정수리 내음을 맡았다. 퀘퀘하고도 편한 냄새였다. 그도 항상 내 머리를 만져주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어린 시절 엄마의 품에 안겨서 짓던 표정을 지어보였고, 그도 꼭 '이 정도면 많이 했다'면서도 두 세번은 더 한올 한올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내일쯤 그에게 수박주스를 사다주면서 오랜만에 긴 눈 맞춤을 나누려 했다. 그의 동네에 찾아가 구석 구석 걸어다니면 서로의 다름을 잊고 길거리에 우리의 추억을 쌓을 수 있었다. 계절별로 쌓여가는 우리의 추억은 향기로웠다. 그와 나는 그의 고등학교 추억이 담긴 골목을 걸었다. 때로는 버스를 타고 나의 고향으로 찾아가서 학교 정자에서 가만히 서로를 안은 채 운동장을 바라봤다. 모래가 많이 날리네라고 하면 우리는 일어서서 다시 걸었다.


별로 말이 없는 사이였다 우린. 서로의 취향이 되기는 정말 어려웠다. 그는 내 손을 처음 잡은 지 세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고백을 받던 그 순간보다 더 긴장하며 얘기를 꺼냈다. 난 자기가 생각했던 사람과 달랐다고. 자신은 내가 더 어른스럽고 더 의젓할 줄 알았다고 했다. 조금 멋쩍었다. 나도 금새 대꾸할 말을 떠올렸다. 나도 우리 사이가 더 편해질 줄 알았다고, 더 친구처럼 지낼 수 있길 원했다고 얘기했다. 둘 다 말문이 막혔고, 한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의 표정이 점차 사라져갈 때, 나는 들어가보겠다고 했다. 그는 내 손을 잡았다. 그래도 내가 좋다고 했다. 나도 알았다고 했다. 잘 지내보자고. 원래 우린 몇 십년을 각자 따로 보내다가 세 달밖에 안 만난것이지 않냐고 얘기했다. 마지막으로 손을 잡았고, 입을 맞출까 했으나 밑에 집 사람이 때맞춰 에헴 소리를 내며 집 밖으로 나왔다. 우릴 지켜보고 있었던 듯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 우리는 서로의 취향이 될 수 없었다. 서로의 취향이 되고 싶어하지 않았다. 잠시 동안 그의 취향이 되보고자 그의 손짓과 발짓을 따라하며 미소를 끌어내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생각보다 별로 웃음짓지 않았다. 나도 별로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갔고, 우리는 점차 만나는 시간은 줄여가고, 스쳐가는 시간은 늘려가면서 그렇게 햇수를 채웠다. 






나는, 목소리가 크고 노래를 좋아했으며 글 쓰는 걸 남에게 보여주기 어색해하면서도 막상 그가 내 글을 봐주길 바랬다. 내가 말해주지 않아도, 내가 보여주기 어색해하더라도 그가 한번쯤은 찾아들어와서 내 글을 보고 난 다음 날 아침에, 이 글을 읽고 든 자신의 생각을 차분히 읊어주길 바랬다. 솔직하게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고 말해주길 바랬다. 그저 덤덤히 너의 글이구나, 라고 말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그는 내가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지조차 잘 몰랐다. 

내가 매일 매일 무언갈 쓴다는 얘기를 들을 때 너는 그저 내가 다이어리 속의 일정들을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영원히 지키지 못할 몇 가지는 외면하면서 또 새로운 할 일을 쓰고 지운다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나도 인정한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다. 너가 그 때 즐겨바르는 핸드크림은 알았다. 네가 해보고 싶었다는 안 어울릴 것 같은 헤어스타일은 기억했다. 네가 안정적으로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갑자기 회계사 얘기를 할 때도 그런가보다, 그게 너의 바뀐 꿈이구나 했다. 

난 네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다.


우린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저 쌓아온 이 시간을 마치 갖다버리기 아까운 줄어든 옷처럼 옷장 한켠에 넣어두고 있었을 뿐, 처음 그것을 샀던 그 순간을 기억하면서 차마 내다버리지 못했을 뿐, 그 뿐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색깔도, 무늬도, 더 이상 내게 맞지도 않은 옷이었음에도 내 돈을 주고 처음 샀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 옷은 빳빳하게 접혀져서 옷장 안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너도 내가 그런 존재였을까.


버스에서 내려서, 그에게 전화를 걸고, 끊고, 동네 한바퀴를 걷고 나서도 천으로 내려가 오리 두 마리를 보고 다시 올라올 동안, 너에게서는 한 통의 전화도 오지 않았다.


...


하지만, 별로 아쉽지가 않았다. 너무 늦어버렸구나, 했다. 너무 부여잡고 있었구나, 했다. 

그의 번호를 지우고, 집에 들어와서 아직 기억에서 지우지는 못한 그의 번호로 전화를 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받은 그 사람의 목소리는 예상보다 밝았다. 그리고 나는 예상보단 어두운 얘기를 꺼냈고, 그는 예상보다 밝았다.


나는 한동안 보지 않았던 거울을 들여다 보면서 내 눈을 맞출 것이다. 이제 나는 굳이 버스를 타고 오르막이 가득했던 그의 동네를 찾지 않을 것이며, 그 또한 볼 것 하나 없는 내 동네로 찾아오지 않아도 될 것이다. 각자의 취향을 찾아서, 때로는 나 자신도 모르겠는 나의 취향을 찾아서 너의 취향에 나를 맞추지 않기로 했고 너도 나의 취향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후련하고 적적한 밤이었지. 나는 좋아했고 너는 싫어했던 주차장 냄새를 마음껏 맡을 수 있는 어두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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