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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원 Dec 21. 2016

정전을 받아들이는 삶

타강가, 빛이 꺼진 어느 날 저녁에

마을에 정전이 왔다.

순식간에 전기가 모두 나갔다.  오늘 오후부터 이상현상이 보이긴 했다. 다이빙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 어제와 같이 과일주스를 사 먹으러 해변가의 노점상에 들렀을 때였다. 고심해서 고른 과일 파파야와 패션후르츠를 깡깡한 얼음과 함께 믹서에 넣어 시원하게 갈리길 기다리는데, 이상하게 믹서기가 평소보다 다섯배는 작은 소리로 영 시원찮게 갈리는 거다. 아저씨는 멋쩍게 웃으며 오늘따라 전구 조명도 잘 안켜진다는 걸 어필했다. 지금 이 마을 전체의 전기가 오락가락한다고 했다. 결국 다 갈리지 못한 내용물들을 채에 걸러 과일 쉐이크라기엔 착즙주스 느낌인 음료를 받아 마시며 호스텔로 돌아와야했다.


그때까지야 어떻든 과일주스 맛은 좋기만 하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호스텔로 돌아와서야 조금씩 문제들이 눈에 들어왔다. 방의 에어컨은 망가져 있었고, 샤워를 하러 들어갔더니 자꾸 전등이 깜빡거렸다. 인터넷 연결은 계속 신호가 끊겼다 돌아왔다를 반복했다. 그런 것들을 마주하고나니 조금씩 답답해졌다.


특히 인터넷이 가장 문제였다. 엄청나게 큰 이 남미 대륙을 짧은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알차게 보고싶은 마음에 다음 일정을 얼른 계획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때문에 며칠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일단 비행기 티켓만 끊고 아무 계획없이 온 상태라 많은 곳을 보려면 지금 잘 일정을 짜서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많은 도시들에 대해 며칠동안 열심히도 찾아봤다. 다른 여행자들의 속성 일정같은 것도 여러개 읽어보며 참고했다. 며칠 새에 남미 여러 도시들의 많은 정보가 머릿속에 꽉꽉 눌러담겨졌다. 오늘은 꼭 대강의 루트를 완성하고, 콜롬비아의 일정은 최대한으로 구체화해야 했다. 욕심은 많아 가고 싶은 곳은 많은데 시간은 너무 없다. 빵빵해진 머리가 빵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믿을만한 정보들을 더 찾아보고, 사람들의 후기도 더 읽어봐야 좀 마음의 결정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인터넷이 계속 먹통이니 뭘 할 수가 없는 거다. 약하게라도 연결이 될 때면 얼른 이것저것 검색을 해보며 하나라도 더 찾아보다가, 속이 너무 답답해져 잠시 모든 걸 내려놓고 의자에 푹 늘어져버렸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정전이 찾아왔다.


팍- 하고 모든 게 꺼졌다. 깜빡이면서 약하게나마 켜져있던 조명들까지 모두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땅거미가 진 후라 세상이 깜깜해졌다. 어두운 시야 사이로 어수선한 공기가 흐르고, 개 짖는 소리와 아이들의 울음 소리같은 게 들렸다. 얼떨떨해진 나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 핸드폰을 확인해 보았다. 전화신호까지 아예 끊겨 있었다.


하지만 어두운 세상은 금새 제 자리를 찾아갔다. 빛이 필요한 사람들은 초에 불을 붙이고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고, 아이들의 울음 소리도 빠르게 잦아들었다. 부엌은 아주 깜깜해 저녁 먹은 접시 설거지도 못하고 있었더니, 묵묵히 요리를 이어가던 호스텔 주방장 아벨은 'tranquil(평온한- 괜찮아, 진정해의 의미로 쓰임)'하고 웃으며 내 접시를 가져갔다. 그야말로 다들 tranquil한 분위기였다.


그러자 곧, 나의 마음도 훅 안정을 찾더니 훨씬 편안해졌다. 어두운 세상에서의 아벨의 미소와 조근조근한 말소리들이 따뜻하게 몸을 휘감았다. 가만히 앉아 눈이 아닌 몸으로 주변을 느끼고 있으니, 꼭 낮에 들어갔던 바다에서처럼 나만의 세상에 온 기분이었다. 옆 테이블에서 잠시 후레쉬를 켜자 벽에 예쁜 그림자들이 일렁이다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초를 켜고 작은 불빛이 유영하다 식어버리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터질 것 같던 머리가 천천히 식어 제 온도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참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먼저, 내가 하고싶은 여행이 뭐였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나는 스스로 많이 느끼는 여행을 하고싶었다. 비행기 티켓만 끊고 온 건 발길 닫는 대로 여행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자유롭고 무궁무진한 선택이 앞에 있었으면 했다. 모든 계획을 짜고 빠릿빠릿 움직이는 여행은 그만큼 많은 걸 볼 수 있겠지만, 이번 여행에서 나는 본다기보다는 느껴보고 싶었다. 그들만의 색깔과 분위기를, 혹은 내 속의 무언가를 말이다. 그니까 나에게, 내 여행에 '효율적'이란 단어를 쓰고싶지 않았다. 모든 곳을 다 가고 싶다고 도시들을 욱여넣고 1박, 2박으로 제한해 촘촘히 일정을 짜 움직일 생각을 한 건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현명하지 못해 뒤로 갈수록 많은 것을 놓쳐버린다해도 그 나름의 깨달음이 거기 있을 것이었다. 조급해 할 일이 전혀 없었다. 그게 이번 여행에 가장 바라던 것이었다.


게다가, 어느 순간 나는 너무 남들의 눈과 귀에 의존하고 있었다는걸 깨달았다. 그 수많은 일정표와 후기를 보며 골머리를 앓았다한들, 그 정보들은 모두 내 것이 아니었다. 좋다는 말에 억지로 시간을 만들어 도시를 추가하고, 별로였다는 말에 예상 숙박일수를 확 줄여버릴 필요가 과연 있었을까 싶었다. 참 좋은 시대다. 참고하기 좋은 정보들이 널렸고, 활용할 방법도 많았다. 하지만, 손가락 몇 번 움직이면 지구 끝의 정보도 얻을 수 있는 이 편한 세상에서, 어쩌면 나는 손가락을 통해 세상을 여행하고 싶었던 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걸 내려놓았다. 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무엇보다 여행을 와서 일어나지도 않은 여행의 문제들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건 참 웃기는 일 같았다. 살면서 하는 수많은, 용기를 자르고 시야를 차단해버리는 쓸데 없는 걱정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들 아닌가. 그대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느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저 '무'의 상태가 되는 것이었다. 기꺼이 머리속을 비우고 정전 상태가 되는 태도가 필요했다.


세상의 잡다한 것들에 시달리지 않는 것, 어느 순간 갑자기 정전이 와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를 가지는 것. 콜롬비아에 와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tranquil'이었다. 항상, 마음에 평화가 있는 것. 정전한 마을에 정전한 마음으로 보는 세상은 공기마저 참 부드러웠다.


혹시나 싶어 올라간 옥상 밤하늘엔 그 언제보다도 밝은 별들이 촘촘히 박혀있었다. 마을의 빛을 모두 앗아간 하늘을 보니 나의 우주를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기꺼이 정전을 받아들이고, 정전에 길들여지는 삶, 그런 여행. 어쩌면 그런 여행을 바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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