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세상에 쉬운 일이 있을 리가

by 디비딥

영화사에 들어가자마자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일찌감치 회사에 들어와 있던 선배작가들은 자기 밑으로 들어온 새끼작가를 훈련시키겠노라 아무 소재나 툭툭 던지며 이야기를 만들어오라고 했다. 잘 기억나진 않는데 ‘스님’과 ‘엄마’와 ‘중독’ 등의 단어들이었는데 그들 역시 즉흥적으로 생각해 낸 것들이었다.

주어지는 대로 열심히 썼다. 서툴고 억지스러워도 내 안에서 즉흥적으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재미를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회사에 쌓여있는, 충무로에서 제작 중인 영화의 시나리오를 읽었다. 이미 캐스팅이 끝난 작품은 배우의 연기를 상상하며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첫 장면부터 흥미롭고 찰진 대사들을 구사하며 술술 넘어가는, 누가 봐도 재미있는 대본을 쓰는 작가들이 마냥 부러웠다.


근무시간은 늦은 오후가 되어서 시작되었고 새벽 첫차를 타고 퇴근했다. 집에 오면 오전 내내 잠을 자고 눈을 뜨면 다시 영화사에 출근했다. 건실한 생활인으로 평생을 산 부모님으로선 답답하고 환장할 노릇이었을 텐데 다행히 나의 활동시간은 부모님과의 대면시간을 가질 수 없는 구조였다. 덕분에 온갖 걱정의 시선과 잔소리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을 수련하면서 알게 되었다. 낮밤을 바꿔 살며 글을 쓰고 새벽에 퇴근하는 일은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었다는 것을. 나와 함께 뽑힌 작가들이 친해질 만하면 그만두었다. 다시 뽑은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관두는 이유는 한결같았다. 도저히 못하겠다는 것.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는 젊은 나이였다. 그리고 함께 뽑힌 작가들은 나보다 더 젊었다. 한낮에 자빠져 자고 밤이 되면 좀비 마냥 활동을 개시해야 하는 삶은 우정도, 연애도, 젊음도 씨를 말려야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자각조차 없이 야행인의 삶에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심지어 꽤나 안정감까지 느끼면서 말이다.


관두는 그들보다 내가 더 나은 능력이 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보다 내가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변변한 직장도 없고 나이만 들어가고 있는 애물단지 노처녀로 바라보고 있는 가족 이하 내 주변의 상식인들 속에서 한밤의 영화사 근무가 아니면 나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나의 가족은 상투적인 이력서의 첫 줄에 등장할 만한 평범함 그 자체였다.

회사원인 가장과 전업주부인 아내, 그리고 다자녀.

잘난 것도, 그렇다고 딱히 취약할 것도 없는 중산층(도대체 한국에서의 중산층 기준은 여전히 모르겠지만) 가정이었다. 더 긴 가방끈을 원했지만 지원해주지 않았던 조부모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던 부모님은 자식이 원하는 공부에 크게 반대를 하진 않으셨다. 가방끈이 길어지면 그들보다 좀 더 성실하고 반듯한 인생을 살 것이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결과를 남들에게 슬쩍 자랑할 수 있는 재미도 기대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내 꼬락서니를 보면 볼수록 그분들에게는 실패한 투자라는 확신이 굳어질 때였다. 영화 일을 하겠다며 허송세월의 연속인 나를 정상적으로 보지 않았다. 아버지의 입에서 '공무원 시험' 얘기가 나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물론 단호하게 거부했고 내 얼굴에 소파 쿠션이 바로 날아왔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가 던진 것이었다. 우리 가족은 결코 개인이 가족과 거리를 두고 고독과 허세와 실패를 오가며 마음껏 방황과 또라이 짓을 하도록 묵인하고 방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밤중 영화사에 콕 박혀있는 것은 그때의 내겐 차라리 짜릿한 해방구였다.

몇 달의 수련 이후 나는 비로소 작품을 쓰고 있는 팀에 합류했다. 부패한 형사가 벌이는 일생일대의 위험한 한탕에 관한 영화였다. 장르는 갱스터 누아르. 주인공은 설경구나 송강호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했다. 말만 들으면 이 영화는 최고의 배우에 기본흥행은 보장된 작품임이 분명했다. 거기에 내 이름이 얹어질 것을 생각하니 상상만으로도 입이 귀에 걸렸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내가 본격적으로 영화에 미치기 시작한 건 다 갱스터 느와르 장르의 영화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충무로에서 처음 쓰는 시나리오를 내가 사랑했던 장르로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남몰래 과하게 벅차올랐던 것도 같다. 나에게 맞는 영화사를 운 좋게 잘 찾아왔단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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