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중학교 2학년이던 시절, 나는 주윤발을 만났다.
내가 처음 본 그의 영화는 <<영웅본색 2>>였다.
바야흐로 영상의 시대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동네 50미터마다 지금처럼 카페가 아닌 비디오 대여점이 늘어서 있던 시절이었다.
<<영웅본색 2>>는 장르별로 진열된 제목을 훑으며 한참을 서성이는 나에게 비디오 대여점 아저씨가 권한 작품이었다. 방금 전 손님이 반납하고 간 테이프이기도 했고 어린 학생이 매장에서 너무 심사숙고하고 있으니 얼른 내보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때 그렇게 나의 영화 인생은 시작되었다.
물론 그전에도 영화는 가끔 보았다. 주로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들을 보며 모험과 도전, 용기 등의 교훈을 새겼던 것 같다. (<<죠스>>, <<ET>>, <<구니스>> 등이 그랬다) 그보다 더 이전엔 텔레비전에서 했던 한국영화들, 주로 눈물 질질 짜는 류의 영화들(<<사랑하는 사람아>>, <<오싱>> 등 주로 똑순이가 똑 부러지는 연기를 했던 영화들이었다)을 눈물 흘리지 않고 보았던 것 같다.
주윤발의 얘기로 돌아오면 그는 참으로 다면적인 인간이었다.
그가 영화에서 주로 하는 일은 위조지폐범, 탈옥범, 킬러 등인데 의리를 나누는 동료들(그래봤자 같은 범법자들이다)에게는 어찌나 위트 넘치고 따뜻하고 호탕한 웃음을 짓는지 감수성 예민했던 10대 소녀는 위법을 일삼는 30대 아저씨에게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가 의리를 저버리는, 그들보다 더한 악당을 만나면 눈빛이 싸늘하게 변한다. 그리고 그의 얇은 입술은 엎어진 3자 모양으로 실룩거리며 성냥개비를 잘근잘근 씹기 시작한다.
이제 그는 쌍권총을 든다.
총을 든 그는 인정사정없다. 그리고 복수의 대상들은 그의 정확한 총구와 헤프게 쓰는 총알에 우르르 피를 흘리며 자빠진다. 혼자의 힘으로 인간 도미노를 완성하는 경지. 위기의 상황엔 계단을 미끄러져 내려가면서도 쌍권총을 난사하는 신공을 발휘한다.
사람이 죽어 나자빠지는데 음악은 비장하고 총구에서 발하는 빛은 화려했으며 몸을 날려 야비한 악당(어차피 그들도 악당이긴 하다)을 끝장내는 액션은 현란했다.
그날 이후, 도파민의 분출을 극한으로 경험한 나는 더 이상 어제의 내가 아니었다. 홍콩영화를 모르는 이전의 나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 이후 나는 <<영웅본색 1>>을 찾아보았고 홍콩영화를 하나씩 섭렵해 가기 시작했다. 환희와 열정에 차오른 나를 세상이 도와주는지 때마침 영화를 보기 좋은 최적의 환경이 펼쳐지기까지 했다. 당시 우리 집에는 비디오를 볼 수 있는 VHS 플레이어가 안방에 놓여 있었다. 부모님이 쓰시는 방이기도 했고 몸이 아팠던 엄마가 자주 누워있었기 때문에 비디오를 보려면 거의 엄마가 외출 시에만 가능했다. 그런데 어느 날 교육용 비디오테이프세트를 판매하는 아저씨가 우리 집을 방문했다. 양복을 빼입은 아저씨는 우리 엄마에게 중학생인 자녀의 영어문법완성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비디오 강의 세트를 권했다. 갑작스럽게 자녀의 교육이 큰일 났다 생각한 엄마는 비디오테이프세트를 단박에 구매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 방에 티브이와 비디오 플레이어가 일체형인 금성 텔레비전을 덜컥 들여놔주었다. 이게 웬 떡이란 말인가! 이제 막 영화에 빠진 딸과 갑자기 교육열이 오른 엄마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콜라보였다!
엄마가 구입한 학습용 비디오는 늙수그레한 남자 강사가 영문법 강의를 미치도록 지루하게 녹화한 것이었다. EBS 강의가 보급되기 이전, 사교육 시장은 어설프고 다양한 교육상품이 출몰했다 사라지던 시절이었다. 강의 테이프가 돌아가는 동안 내가 진심으로 열심히 보고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보상의 차원으로 당당하게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도파민이 넘치도록 분출되던 신바람 나는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