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나 엿맥이는거 맞지?"
"무슨 주임급이 6개월 계약직이야, 인턴도 아니고"
"내말이 그말이야, 게다가 6개월이 요즘 어딨냐, 쥐꼬리 월급 받고 적당히 있으면 될텐데 ,얘는 겁나게 부지런해. 부장은 나만 보면 걔 얘기야. 일부러 나 엿맥이는거 맞지?"
"그럼 걔한테 일을 다 주던가 씨발. 근데 너 조심해라. 낙하산 냄새가 솔솔 난다. 성도 같은데 빼박이지. 갈때 되면 정체가 밝혀지겠네, 그때까지 너 걔 앞에서 조심해라. 마셔 마셔."
서울 종로. 기린 컴퍼니 앞 양꼬치 집. 박찬성이 소주 한잔을 원샷했다. 상우는 술을 채워주며 찬성을 달랬다. 찬성은 최부장을, 아니 류주임을 칭친하는 최부장을 견디기 힘들었다. 류주임은 6개월 전 경쟁업체에서 인턴직을 했다고 했다. 기린 컴퍼니 입사 후에는 매일 아침 6시 30분에 출근해 사무실 불을 켜고, 회식이 아니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자리를 지키며 문서 작업을 했다. 야근과 주말 출근 지시에도 토를 다는 법이 없었다. 류주임은 3개월 만에 최부장의 총애를 받는 모범 직원이 되었다. 직원들 사이에선 오너 가문의 먼 친척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기린컴퍼니 회장 이름이 류기열이었으니 나올 만한 얘기였다.
불공평하게도 류주임의 외모 또한 넘사벽이었다. 류주임을 만들어낸 어머니는 주이탈리아 대사관에서 근무하다 이탈리아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그 결과 동양의 도자기같은 피부와 서양의 슬림한 얼굴 형태에 광대뼈까지 살짝 튀어 나온 남성다운 외모가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혼혈임을 알 수 있는 부위는 류주임의 눈 정도였다. 짙은 눈썹 밑에 옅은 쌍꺼풀은 무표정일땐 거친 인상을, 표정을 지을땐 예민한 인상을 주었다. 눈동자가 은은한 초록색 빛깔을 띄었다.
여직원들은 보지 않아도 냄새로 류주임의 기척을 알아챘다. 류주임이 지나칠때면 옅은 조말론 향수 냄새가 난다는 거다. 그게 어떤 향수 브랜드인지 찬성은 여직원들이 말해줘서 알았다. 류주임은 회식때도 빼는 법이 없었다. 폭탄주를 제조할때 맥주잔을 흔드는 스냅도 누구보다 능숙해보였다. 번거로운 문서작업을 도맡은 탓에 회식 자리에선 눈이 뻘겋게 충혈되기도 했는데, 그럴땐 여직원들이 먼저 류주임의 등을 떠밀어 귀가시켰다.
두 사람은 소주를 세병째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성아,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걔도 살려고 그러는거야. 너는 정규직이잖아."
"그랬음 좋겠다. 남 안되길 바란건 태어나서 처음이네. 아, 씨 사무실에 이어폰 놓고 왔네. 잘 가고, 또 보자"
"야야, 이 새끼 사람이 아니야."
기린 컴퍼니의 밤은 조용했다. 누군가 사무실 복도 끝을 지나 사라지는게 보였다. 꼿꼿한 걸음걸이로 보아 류주임이 막 야근을 끝낸 것이 분명했다. 사무실 왼쪽 복도는 일반 직원이 갈 일이 없었다. 간이 물류창고가 있고, 청소아주머니들이 쓰는 집기류와 티슈 등을 보관하는 공간만 있었다. 찬성은 류주임의 뒤를 따라갔다. 류주임은 꺾어진 복도 끝까지 걸어가 가장 마지막 문으로 들어갔다. 물류창고였다. 찬성이 창고 문을 열자 컴컴한 어둠 속에 정적이 흘렀다.
"류주임? 거기서 뭐해?"
어둠 속에선 두 개의 빨간 불빛이 규칙적으로 깜박이고 있었다. 찬성이 조명 스위치를 올리자 창고 한복판에 류주임이 앉은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셔츠는 풀어젖혀져 있었고, 가슴팍에는 두꺼운 전선이 연결되어 벽의 콘센트로 이어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깜박이던 빨간 불빛은 류주임의 눈이었다. 평소의 은은한 초록색이 아닌, 선명한 빨간색이었다.
"류주임...?"
찬성이 류주임의 어깨를 흔들어 보았다. 반응이 없었다. 패닉 상태가 된 찬성은 류주임의 뺨을 가볍게 때려보았지만, 여전히 무반응이었다. 주변에 더 이상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벽면에는 대형 캐비넷이 있었고, 그 안에는 류주임이 평소 즐겨 입는 옷들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정장, 셔츠, 바지가 똑같은 간격으로 걸려 있었다. 마치 인형을 위한 옷장 같았다. 캐비넷 옆에는 김치냉장고처럼 보이는 대형 수납함이 있었다. 찬성이 열어보니, 그것은 대형 음식물쓰레기 처리기였다. 이렇게 큰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는 본 적이 없었다. 찬성은 다시 류주임의 몸을 세게 흔들었다.
"급속충전중... 완료까지 47분 남았습니다."
"아, 씨발, 깜짝이야"
류주임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의식이 없는 듯 했다.
"이 새끼, 이거 안드로이드야?"
찬성이 류주임의 셔츠 컬러를 내리까자 류주임의 뒷목에 작은 마크가 보였다. 어깨 날개뼈 사이의 경추 부위에 푸른색 만성전자 로고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류주임의 빨간 눈이 서서히 색을 바꾸기 시작했다. 빨간색에서 주황색으로, 그리고 점점 더 초록색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상우는 물류창고를 뛰쳐나왔다. 최부장의 총애를 받는 완벽한 직원. 실수 하나 없이 모든 업무를 처리하고 야근과 주말 출근도 마다하지 않는 직원. 어쩐지 찬성은 묘한 안도감이 일었다. 사람으로서 이렇게 까지 잘 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찬성의 모든 실수와 게으름과 이기적인 일상에 면죄부가 되어 줄것 같았다. 그러다 최부장을 생각하니 다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최부장이 모든걸 다 알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상우는 물류창고로 돌아가 스마트폰으로 류주임의 모습을 여러 컷 찍고서야 회사를 빠져나왔다.
찬성은 다음 날 상우를 다시 만났다.
"왜, 또 최부장이 류주임 들먹여?"
"야야, 이 새끼 사람이 아니야."
"걔 또 야근하디? 그런 놈들이 회사에 꼭 한놈씩 있어. 그러려니 해라. 근데 그런 놈들이 꼭 나중에 임원 되드라."
"그게 아냐 임마, 이거 봐"
상우는 스마트폰을 꺼내 동영상을 재생했다. 영상 속 류주임이 의자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빨간색 눈동자가 3초에 한번씩 깜빡거렸다. 상우가 류주임의 몸을 세게 흔들자 류주임의 입에서 "급속 충전중"이라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영상은 목 뒤의 푸른색 만성전자 마크를 보여준 후 가슴팍에 플러그를 꼽고 앉아 있는 류주임의 모습을 풀샷으로 보여준 후 끝났다.
"홀리 쉣, 만성전자 대박이다! 내일 당장 주식 사자 주식!"
"주식이 문제냐, 최부장 이 새끼는 이거 다 알았겠지? 어쩐지 류주임 들먹이면서 날 엿맥이는것도 다 이유가 있었아."
"잠깐만, 만성전자와 로봇, AI관련한 주요 뉴스 제목을 최근 3년치까지 뽑아봐"
상우의 말을 들은 스마트폰이 뉴스를 나열했다. 그중 경성일보의 단독기사가 눈에 띄었다.
[단독]만성전자, AI 휴머노이드 실증사업 추진... "일반 사무직 대체되나"
경성일보 최호진 기자 | 2024년 4월 17일
만성전자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함께 휴머노이드 실증사업에 착수한 것으로 확인됐다. 17일 본지가 입수한 '휴머노이드 근무환경 적응성 평가 계획안'에 따르면, 만성전자는 지난해 인수한 미국의 휴머노이드 제조업체 '휴먼테크'와 AI 스타트업 '씽크AI'의 기술을 결합해 개발한 휴머노이드 10대를 올해 하반기부터 국내 다양한 기업에 시범 배치할 계획이다.
이번 실증사업은 제조업 현장이 아닌 일반 사무직 영역이다. 문서에 따르면 중소기업 및 대기업의 인사, 재무, 기획 부서 등에 로봇 직원을 배치해 일반 사무직 업무 대체 가능성을 검증한다는 계획이다.
문건에는 올 하반기부터 내년 상반기까지 약 6개월간 휴머노이드 직원들이 실제 업무 환경에서 근무하며 적응성을 테스트하고, 이를 바탕으로 2026년부터 상용화를 목표로 한다는 구체적인 일정까지 명시되어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관계자는 "특정 기업과의 협력에 대해 언급할 수 없다"며 "다만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춰 국내 로봇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검토 중"이라고만 답했다.
업계에서는 이번 실증사업이 성공할 경우 국내 일자리 지형에 큰 변화가 올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국미래경제연구원 김태윤 연구위원은 "초기에는 단순 업무부터 시작하겠지만, 기술 발전 속도를 고려하면 5년 내 중간 관리직까지 상당 부분 대체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노동계에서는 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은 성명을 통해 "로봇 도입에 따른 고용 안정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며 "기업들의 일방적인 로봇 도입 추진에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만성전자 측은 "휴머노이드 개발 사업을 진행 중인 것은 사실이나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며, 실증사업에 대해서는 검토된 바 없다"고 밝혔다.
기사가 나간 시점 이후 만성전자의 주가는 계속해서 완만하게 오르고 있었다.
"실증사업 시작 시기가... 6개월 전이야. 류주임이 너희 회사에 온 시기랑 정확히 일치해."
"뭐? 그럼 우리 회사가 그 실증사업에 참여한다는 거야?"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최부장만 알고 있을 수도 있고."
"씨발... 그럼 나 류주임 때문에 스트레스 받은 게 다 정부 실험 때문이었다고?"
상우는 계속해서 검색을 이어갔다.
"가만있어봐. 그러니까 류주임 머리는 AI로 돌아간다는거 아냐. 서버는 만성전자에 있겠네. 만성이 인수한 씽크AI는 취약점 때문에 욕도 많이 먹었어. 학습 능력이 정말 탁월한데,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주면 망칠 수 있대."
"류주임을 속일 수도 있다는 얘기야?"
"정확해. 류주임이 일을 잘 하는 이유가 뭐겠어. 실증사업 평가 결과가 좋게 나와야 하니까. 어떻게든 평가를 좋게 받는 일에 목을 매지 않을까. 그걸 잘 이용해봐."
"우리 회사에 알려지지 않은 평가 항목이 있어"
다음날 아침, 찬성은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 6시 25분,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찬성은 화장실에서 나오는 척하며 류주임과 마주쳤다.
"류주임! 오늘도 일찍 왔네."
"네, 박대리님. 좋은 아침입니다."
"저기, 내가 너한테만 알려줄 게 있어서. 옥상에서 커피 한잔 어때?"
"네, 좋습니다."
두 사람은 자판기 커피를 한잔씩 들고 옥상 바람을 맞고 있었다. 류주임의 초록색 눈동자가 평소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 눈이 얼마 전 빨간색으로 깜박이던 그 눈이라니.
"류주임, 사실 우리 회사에 알려지지 않은 평가 항목이 있어. '루틴한 일과를 지속 가능하게 유지하는가'라는 건데, 너한테만 알려주는 거야."
"평가 항목이요?"
류주임의 초록색 동공이 살짝 커졌다.
"그래. 여기서 중요한 건 언제 출근해서 언제 퇴근하느냐야. 사실 너무 일찍 오고 늦게 가는 건 오히려 감점 요인이야. 왜냐하면 그건 업무 효율성과 체력 관리를 하지 못한다는 증거거든. 스스로 체력관리, 심신안정 관리를 제대로 하는 게 상당히 중요한 배점을 차지해."
"아... 그렇군요."
"그리고 이건 정성 평가 항목이야. 데이터화 돼서 평가하는게 아니라, 상급자와 주변 동료들이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중요해. 사실 다들 알고 있어. 그래서 정시 출근, 정시 퇴근하는 거야. 너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던 거지."
류주임의 초록 눈이 파르르 떨렸다. 메모리에 업데이트라도 하는 것일까.
"그럼 제가 정시에 출퇴근하는 게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인가요?"
"그렇지. 이건 너한테만 알려주는 거니까 비밀로 해줘. 최부장한테 물어봐도 절대 그런 항목은 없다고 할거야. 평가 기준에 대해 물어보는것도 정성평가에 안좋은 영향을 미쳐"
"감사합니다. 박대리님."
찬성의 조언이후 류주임은 더 이상 새벽같이 출근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6시 30분부터 불이 켜져 있던 사무실이, 이제는 9시가 되어서야 완전히 활기를 띠었다.
최부장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평소같으면 류주임이 출근해 커피를 내려놓고 업무를 시작했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그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박대리, 류주임 어디 갔어? 아픈가?"
"모르겠습니다. 아직 안 왔네요."
찬성은 무심한 척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 류주임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8시 55분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최부장님. 박대리님."
"오늘 늦었네? 무슨 일 있었어?"
최부장이 유난히 ‘늦었다’는 대목에서 데시벨을 높였다.
"아닙니다. 정시 출근했습니다. 5분 빨랐습니다"
"정시... 출근? 근데 너 평소에는..."
"네, 이제부터는 루틴한 일과를 지속 가능하게 유지하려고 합니다. 업무 효율성과 심신 안정을 위해서요."
최부장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날 이후, 류주임은 매일 정확히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했다. 한 시간도 더 일하지 않았다. 업무는 여전히 완벽하게 처리했지만, 그 시간 안에 끝나지 않는 일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일주일 후, 최부장은 결국 참지 못하고 류주임을 사무실로 불렀다.
"류주임, 요즘 많이 변한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었나? 예전에는 훨씬 더... 열정적이었잖아."
"부장님, 저는 제 업무에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다만 건강한 일과 삶의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팀 일 많은거 몰라? 가끔은 야근도 필요하고..."
"부장님, 제가 업무 효율성에 관한 연구 자료를 읽었는데, 지속적인 야근은 장기적으로 생산성을 저하시킨다고 합니다. 오히려 규칙적인 일과가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대요."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급한 일이 있을 때는..."
"물론 예외적인 상황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일상이 되어서는 안 되겠죠. 근로기준법 제50조에 따르면 주당 법정 근로시간은 40시간이며, 연장 근로는 주 12시간을 초과할 수 없습니다."
"그... 그래. 알았어. 가봐."
"내 동생 같아서 해주는 말인데..."
일주일 후, 찬성은 류주임에게 점심을 먹이며 두 번째 작전에 돌입했다.
"류주임, 내 동생 같아서 해주는 말인데, 우리 회사에 또 하나의 중요한 평가 항목이 있어. '자기 주관이 뚜렷한가'라는 거야."
"자기 주관이요?"
"그래. 상사의 의견에 무조건 따르기만 하는 사람보다 자기 생각을 분명히 표현하고 때로는 반대 의견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을 회사에서 높이 평가해. 이건 기린 컴퍼니가 임원급 인재를 양성하려는 기조와 직결되어 있거든."
"상사의 지시에 따르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요?"
"물론이지. 하지만 무조건 '네'만 하는 건 주관이 없다고 평가돼. 특히 부서장에게는 더 그래. 여기서 상사란 부서의 헤드 역할을 하는 부서장을 의미해. 최부장 같은."
"최부장님께 반대 의견을 제시하라는 말씀이신가요?"
"아니, 반대 의견을 제시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최부장도 사람이잖아 사람. 사람은 항상 빈틈이 있고, 그걸 부하직원들이 보완해줘야지. 잘못된 판단을 하거나, 부족해 보이면 그걸 즉각 지적해줘야 돼. 데이터 정확도가 부족하다거나, 기획 방향에 현실성이 없다면 그걸 그대로 둬야 할까? 부족한 걸 말해줄 수는 있잖아. 그래야 나중에 임원급으로 성장할 수 있어."
류주임의 눈이 반짝거렸다. 무언가를 업데이트 하는 모양이었다.
최부장이 새 프로젝트 방향을 제시했을 때, 류주임이 손을 들었다.
"최부장님, 죄송하지만 그 접근법은 데이터 정확도가 떨어집니다. 우선 그 의료 플랫폼 시장의 성장 전망 수치에 대해 출처가 불명확합니다."
"어? 뭐라고?"
최부장이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류주임을 바라보았다. 최소한 찬성이 기린 컴퍼니와 함께 한 역사상 부하직원이 최부장의 의견에 토를 다는 일은 없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부장님이 장표에서 제시하신 시장 전망치는 구글 검색에서 인용하신 듯 합니다. 그런데 출처를 따라가 보면 정체불명의 외신기사 한 줄이 다입니다. 그리고 그 외신의 출처를 따라가 보면 한 국내 온라인 매체가 쓴 기사가 나오고요. 그 매체는 다른 시장 전망치를 잘못 번역했습니다."
"아,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일단 이 기획 의도는."
"부장님, 전망치에 근거가 빈약하면 빈약한 근거를 기반한 계획도 의미가 없습니다."
회의실에 5초간 정적이 흘렀다. 이 광경을 보고 있는 찬성은 숨을 참고 있었다.
"아, 회의는 오후에 다시 소집하겠습니다. 일단 해산"
그날 오후 회의는 류주임 없이 진행되었다. 류주임 효과 덕분인지 주당 3번 이상 열리던 기획 회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회의가 왜 줄었는지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최부장이 직원들 앞에서 류주임을 칭찬하는 일은 없었다. 직원들도 류주임과 말 섞기를 꺼렸다.
"류주임, 힘들지? 바람도 쐴 겸 요 앞 스벅에서 차 한잔 어때?"
부서 회식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찬성은 마지막 카드를 썼다.
"류주임, 네가 이 회사에서 정말 잘 크고 싶으면 이것도 알아둬야 해."
류주임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우리 회사에는 '무리하게 업무 외 일정에 신경을 쓰는가'라는 평가 항목도 있어. 지나친 사회성이 오히려 업무 집중도를 해칠 수 있다고 보거든."
"업무 외 일정이요?"
"그래, 회식이나 야유회 같은 거. 일에만 집중하는 사람이 더 높은 평가를 받아. 사교성이 좋아서 널리 알려지는 것보다 일에 집중해서 실력으로 인정받는 게 중요하거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류주임의 눈이 다시 반짝거렸다. 그날 오후 류주임은 최부장 책상 앞에서 폭탄 발언을 했다.
"부장님, 오늘 회식은 개인 일정으로 참석하기 어렵습니다."
"한달 전에 잡은 회식인데?, 네가 무슨 일정이 있어?"
최부장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네,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한 자기 계발 시간입니다."
그 뒤로 회식자리에서 류주임을 볼 일은 없었다. 류주임의 업무 퍼포먼스는 변한게 없었지만 최부장 입장에선 눈엣가시같은 존재가 되어갔다. 최부장은 류주임이 6개월 계약기간이 끝나 일주일 후 떠나게 된다고 직원들에게 통보했다. 찬성은 속이 후련할 거라 생각했지만 묘하게 가슴이 답답하고 죄책감마저 들었다. 퇴사가 하루 앞으로 다가오자 찬성은 류주임에게 저녁을 사기로 했다. 무언가를 얘기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들은 회사 근처 조용한 일식집에서 만났다. 사케 한 병을 시키고 난 후, 찬성은 입을 열었다.
"저는 퇴사하면 1506번 버스를 타야 합니다."
"저기, 사실은 말이야. 나 네가 어쩐 존재인지 알고 있어."
"네"
"아니, 내 말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은거야?"
"그날 물류창고에서 저를 보셨잖아요."
"어, 그거 알았어?"
"충전이 끝나고 제 시스템에 저장된 녹화 이미지를 분석해봤거든요."
"그런데도 내 말을 따랐어?"
찬성은 얼굴이 붉어졌다.
"네. 제 임무는 업무 퍼포먼스도 중요하지만, 동료들과 잘 어울리고 적응하는 것 또한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박대리님의 조언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했지만, 인간 관계의 역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데이터라고 생각했습니다."
찬성은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교묘하게 세뇌시켰다고 생각했던 행동이, 류주임에게는 그저 또 다른 학습 경험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럼 넌 이제 어떻게 돼?"
류주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제스처가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찬성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저는 퇴사하면 1506번 버스를 타야 합니다."
1506번은 유일하게 수원까지 가는 시외버스였다. 그곳엔 만성전자의 R&D 센터가 있었다.
"미안해, 내가 너를 망친것 같아."
"괜찮습니다. 오히려 흥미로운 학습 경험이었습니다."
류주임은 잠시 망설이더니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혹시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뭔데?"
"저에 대한 설문조사입니다. 저와 같이 일했던 동료로서 평가해주신다면 많은 도움이 될거에요."
화면에는 'A직원 직원 평가 설문'이라는 제목과 함께 여러 항목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업무 효율성', '동료와의 협업', '적응력', '업무 완수에 대한 책임감' 등의 항목이 보였다. A직원이란 안드로이드를 뜻하는 말일 터였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 못하겠어. 네가 아니라 만성전자에 도움이 되는 일이겠지. 말 몇마디로 누군가의 삶에 또 영향을 끼치기 싫어."
류주임은 잠시 찬성을 바라보더니, 이해한다는 듯 태블릿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이해합니다.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둘은 헤어졌다. 찬성이 류주임과 악수를 하며 손을 잡았을 때, 그 따뜻함이 인공적인 것이라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다른 버스 타면 안되는거야? 그 버스 타지 마"
다음 날, 류주임은 마지막 근무를 끝내고 사무실을 돌며 동료들에게 인사했다. 최부장은 형식적인 작별 인사만 건넸고, 다른 팀원들도 어색하게 행운을 빌어주었다. 류주임이 찬성의 책상 앞에 왔을 때,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박대리님,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언젠가 또 뵙고 싶습니다."
찬성은 잠시동안 말을 잇지 못하자 류주임이 목례를 하고 사무실을 걸어나갔다. 그 순간 찬성의 머릿속엔 류주임이 아예 삭제돼 버릴 거라는 불안감이 싹텄다.
"류주임 잠깐만"
"예, 박대리님"
"저기 말이야, 다른 버스 타면 안되는거야? 그 버스 타지 마. 정말로, 정말로 동생 같아서 해주는 말이야."
그 순간 류주임의 초록색 눈동자가 빠르게 점멸했다. 하지만 류주임은 답을 하지 않고 돌아선 뒤 뚜벅 뚜벅 걸었다. 그날 따라 비가 내렸다. 찬성은 사무실에 돌아와 창가를 바라보았다.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는 류주임의 모습이 보였다. 한참을 지나 류주임이 겉는 모습은 작은 느낌표가 되었다. 환승센터 역할을 하는 버스 정류장엔 수십여명의 승객들로 북적였다.
서너대의 버스가 동시에 도착하자 승객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도착한 버스에는 1506번 버스도 있었다. 류주임이 그 인파에 섞여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찬성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작별인사를 했다. 그가 어느 버스를 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버스가 지나간 자리에 빗물이 고여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