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 감사 시즌

by 천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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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굴지 광고회사중 하나로 꼽히는 기린 컴퍼니의 마케팅 3부에 의문의 프린터가 도착한 건 월요일 아침이었다. 프린터는 검은색 외관에 '감사팀 전용'이라는 라벨이 붙어있었다. 말끔한 디자인이지만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A4용지가 출력되는 용도였지만, 일반 가정용 프린터에 비해 그 부피가 엄청났다. 왠만한 대형 복사기의 2배 수준이었다. 바퀴가 달렸지만 성인 남성이 밀기에 벅찼다. 종이 말고도 무언가 다른 부품이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것 같았다.

"감사팀에서 보냈어요. 2주 후 감사 준비를 위해 미리 설치해 달라고 하네요."

박 과장이 이메일을 읽으며 눈을 찌푸렸다. 요즘 회사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갑작스러운 사업부 구조조정 소문이 돌았고, 누가 먼저 잘릴지 모두가 전전긍긍하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정기감사 시즌이 돌아왔다.

“뭔 프린터가 이렇게 커요? A4용지 출력용인데? 검찰 출동이라도 한대요?”

이 대리가 물었다.

"감사팀이 쓸 보고서용이라는데, 네트워크 연결하고 일단 24시간 전원을 켜두라네. 자체 테스트를 한대나 뭐래나."

박 과장은 매뉴얼대로 전원과 네트워크를 연결했고, 프린터는 조용히 대기 모드에 들어갔다.

일주일 동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다 다음 주 월요일 아침,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실습생 미나의 컴퓨터 화면에 작은 팝업창이 나타났다.

‘익명 메시지 시스템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이 창에 입력하면 프린터로 익명 출력됩니다.’

미나는 호기심에 한 줄을 입력하고 전송 버튼을 클릭했다.

‘김 부장님, 오늘도 어제와 같은 옷을 입고 오셨네요. 셔츠 세 벌만 돌려 입는 거 다들 알아요.’

미솔솔, 미솔솔, 라라라라라-

프린터가 조잡한 음질로 음악을 내보냈다.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그 음악. 트럭이 후진할때 내는 그 음악이었다. 팀원들이 프린터 앞에 다 모였을 때 프린터가 종이 한장을 출력했다. 정확히 미나가 입력한 내용이었다.

"누가 장난을 쳐?"

출력물을 본 김 부장이 소리쳤지만, 다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미나 역시 시치미를 뗐다.

그날 오후, 모든 팀원의 컴퓨터에 같은 팝업창이 나타났다. 익명으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는 사실에 팀원들은 처음엔 장난스러운 내용을 보냈다. 조잡한 음악 한 소절이 지나가면 팀원들은 누군가의 마음의 소리를 ‘볼’ 수 있었다.

‘회사 싸구려 원두콩 징허다, 스타벅스 콩으로 갈아라. 이돈 아낀다고 회사가 돈을 버냐’

‘에어컨 좀 더 씨게 틀어줘.’

‘어제 내 도시락 누가 훔쳐갔냐!’

이틀째부터 메시지의 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 대리는 회사 노트북으로 밤마다 넷플릭스 본다.’

‘이 부장, 지난달 회식때 영수증 부풀렸지?’

‘박 과장은 면접때 경력 2년 뻥튀기함.’

숨겨진 불만과 고발이 쏟아져 나왔다.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사실 여부는 공격 당한 당사자만이 알았으므로 누군가에겐 치명적이었다. 한 주가 더 지나자, 살기 위한 공격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왜 우리만 갖고 그래, 최이사는 작년 판공비를 개인용도로도 쓰드만.’

‘김부장 지난번 판다 컴퍼니 임원하고 저녁 먹던데, 점프 하려고?’

‘서 대리,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 남의 기획안 훔쳐서 네가 발표한거 우리 팀 다 알어.’

사무실은 얼어붙었다. 아무도 그 프린터에 관심을 갖지 않는 척 했다. 하지만 음악이 흐를 때마다 누군가는 휴식을 핑계로 자리를 비웠다. 잠시 바람을 쐤다가 돌아올 때 프린터 출력물을 무심한 척 하며 보는게 일상이 되었다.

그날 오후, 감사팀에서 메일이 왔다.

"예정된 감사가 내부 사정으로 1주일 연기되었습니다."

팀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프린터의 익명 메시지는 계속되었다.

‘최 팀장은 여자 직원들에게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했어’

‘김 과장, 야근할 때마다 놀다 들어와서 수당 청구함. 출입기록좀 확인해봐라.’

”다들 여기 글이나 쓸 만큼 한가해? 박과장, 내가 책임 질테니까 저 프린터 코드 뽑아버려!“

박과장이 프린터 코드를 뽑은 후 직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팀이 오기 전까지는 더이상 조잡한 음악을 들을 일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10분 후, 프린터가 다시 부팅되었다. 프린터의 작은 액정 계기판에는 ‘내장 배터리, 저전력 모드’라는 문구가 깜박이고 있었다.

금요일 아침, 사무실은 전쟁터가 되었다. 서로를 향한 비난과 변명이 오갔다. 누구도 자신의 비밀이 다음에 폭로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매일같이 프린터에서 조잡한 음악이 흐르면서 사실 확인도 되지 않는 폭로 게임이 계속되었다. 프린터가 출력물을 쏟아낼수록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해졌다. 공격을 많이 받는 대상일수록 나중에 해명할 일도 많아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직급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 많은 공격을 받았다.

"누가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야?" 최 팀장이 분노했다.

"모두 거짓말이야!" 김 부장이 소리쳤지만, 그의 눈빛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다음 주 월요일, 감사팀에서 또 연기 메일이 왔다.

"감사가 추가로 2주 연기됩니다. 준비에 차질 없으시길 바랍니다."

프린터가 출력하는 익명의 메시지는 더 악랄해졌다.

‘김 부장은 업무용 접대 골프들 친다더니 친구들하고 다녀왔다던데.’

‘이 부장 프로젝트 발주비가 왜 비싼지 아는 사람? 답, 비쌀수록 뒤로 받는 리베이트도 짭짤해서.’

관리자급에겐 프린터의 음악 소리가 공포로 다가왔다. 둘째 주가 끝날 무렵, 최 팀장은 갑작스럽게 사직서를 제출했다. 사직서에 적은 이유는 ‘일신 상의 사유’였지만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셋째 주, 김 부장과 이 부장도 사직서를 냈다. 넷째 주가 되자 정 대리와 서 대리도 떠났다. 한 달이 지나자 마케팅 3부 25명의 절반이 회사를 떠났다. 남은 팀원들은 공포에 떨었다. 공포는 마케팅팀 감사가 보류되었다는 회사 공지가 도착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그날 푸른색 조끼를 입은 엔지니어가 프린터를 회수해 갔다.

"올해 목표 초과 달성이네요."

비밀리에 꾸려진 기린 컴퍼니 구조조정본부에서 컨설턴트가 태블릿을 보며 말했다.

"덕분에 권고사직 비용이 예상치의 10분의 1밖에 들지 않았네." 김 이사가 웃으며 대답했다.

"익명 메시지 시스템이 사람들의 불신과 갈등을 증폭시키는 효과는 언제나 완벽합니다. 특히 불안한 시기에는요."

"계약대로 퇴사자 한 명당 연봉의 5%를 컨설팅 비용으로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김 이사가 제안했다.

"다음 타겟 부서는 어디로 할까요?"

"영업 2팀이 좋겠네요. 그쪽도 인건비가 너무 높아요."

다음 날, 영업 2부에 감사팀 스티커가 붙은 프린터가 배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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