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 - 밤에 갇힌 밤

밤은 밤에 꼼짝없이 갇혀 새끼를 친다.

by Dichterin 여자시인

밤에 갇힌 밤



날이 차다

만년필의 잉크를 갈아 끼웠다

검정 잉크를 죄 동내고서

파란 잉크를 끼웠다

촉에 남아있던 검정 잉크가

섞여 나오다가 이내 암청색 잉크가 나온다


어딘지 녹슬은 색이다

차거운 날 밤에 어울리는

차거운 먼지 끼인 색이다


해묵은 빛깔의 글씨들을 지어내면서

차거운 밤의 안개를 부셔가며

똑 똑 글자들을 부러뜨려

허공에 먼지처럼 흩뿌려 본다


일부는 내 얼굴 위로 떨어지고

일부는 공기 중에 빙글 모빌처럼

군무를 추다가 내 발등 위로 떨어진다

사금파리가 되어 내 세모진 발을 장식한다


아침까지는 가을이었다가

이제부터는 가을에 겨울이 섞였다

내 만년필 닙의 검정 찌끄러기에 파랑이 섞여 나오듯이

겨울은 어느 밤에 암표를 한 장 얻어서

몰래 가을 위에 승선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배는 무심한 먼지 색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는데

바다의 빛깔은 밤의 빛깔을 복사하고 있으니

코발트의 안료에 흑연을 개어

콜타르만큼 끈끈하게 치대어

밤 위에 밤을 덧칠하고 싶다


검푸른 밤을 한층 더 검푸르게 하여

하나의 밤 곁에 새로운 밤을 접붙여주고 싶다

차거운 밤에게 동무를 애인을 짝꿍처럼 붙여주고 싶다

밤들이 서로 껴안아 밤은 한층 푸르러지는데

나는 밤과 밤 사이에 갇혀서 밤의 포옹을 받을 테다


밤은 나를 가두고

밤은 밤에 갇혀서

밤과 밤은 또 밤 하나를 더 낳는다



Untitled_Artwork 6.png 별빛이 뒤섞인 밤의 공기가 유리병에 갇히는 순간. (Pexels에서 본 오리지널 사진을 일러스트 버전으로 구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