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이 많은 아이

소설 <창문 없는 방>

by Dichterin 여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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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내가 정말로 무지무지 예쁜 아기를 본 적이 있어, 언니-"


여자는 집에 들러 차를 마시러 온 언니에게 대뜸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면 여자는 자신이 어린아이들을 특별히 많이 좋아했던 때가 있었나 싶다. 결혼도 아직 안 했고,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아이를 만들어 올 일이 암만해도 없어 뵈는 그런 여자였다. 언제부터인가 멈춰버린 생리는 더욱 여자를 안달 나게 하기는커녕 되려 안도하게 만들 정도였다. 생리 이야기는 언니에게 하지 않을 거라고 여자는 처음부터 다짐했었다. 그럼 또 무슨 난리를 피울까, 그 성격에.


심드렁한 대꾸가 이어졌다.

“아기들은 다 예쁘지 않던?”


“아니, 그런 것 말고. 아기라서 예쁜 것 말고. 정말이지 어쩜 인간의 태(胎)에 그렇게 예쁜 생명이 열 달을 살다가 나올 수 있는 걸까 싶어서 넋을 놓고 턱을 늘어뜨리고 구경했어. 그런 아기가 나중에 자라서 '엄마-엄마-' 하고 불러주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을 거야. 나는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


여자는 방금 그 ‘엄마-‘를 발화할 때 세상에 더없이 평온한 표정이었다. 그 눈동자는 빛났으며 가장 깊은 부분에 쓸쓸함과 비슷하되 어설픈 감상주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여자 특유의 눈빛을 간직하고 있었다.


“내가 어느 날, 막 걸어가고 있었어.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어. 약속을 한 상태여서, 약속시간에 늦을까 봐 잰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모퉁이를 도니까 저 쪽에서 한 가족이 걸어오고 있었어. 젊은 부부랑 가운데 유모차 하나. 꽤 멀리 있었는데도 아기가 있지, 정말 선명하게 보였어. 차라리 그 엄마 아빠는 흐릿했어도 아기는 또렷했어.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입에는 공갈젖꼭지를 꼭 물고 빨면서…”


여기서부터 여자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핫—' 정도의 야트막한 웃음으로 시작하여 점점 모션이 커지면서 정신을 놓친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시간이 경과해 있었다.

언니는 침착했다.

언니는 본래가 그런 사람이다.

언니는 자기 잔에 차를 우려내고 여자를 주려고 새로운 거름종이를 끼워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그 사이 여자는 진정했다. 더 이상 웃거나 혹은 울거나 하지도 않았고 묵묵히 핸드드립용 물주전자의 날씬한 주둥이에서 졸졸 흘러나오는 물줄기를 구경할 따름이었다.



“너 커피 좀 줄여야 해. 알고 있지? 이게 오늘 마지막 잔이야.”


언니가 이렇게 말할 때는 꼭 여학교 기숙사 사감이나 학생주임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도 여자는 언니가 한 번씩 핀잔을 주기를 기다렸다. 이런 방식으로만이 언니에게서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면, 언니가 택한 나름대로의 표현 방식이라면 여자는 그렇대도 그 자체로 다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번 콕-하고 찔리고 나면 희한하게 더는 외롭지 않았다. 독설가 딱따구리 언니. 내 언니.


여자는 멋쩍게 웃다가 오른쪽 귀 뒤로 머리칼을 넘기면서 말했다. “커피를 꼭 마셔야만 하겠는데.”


“얼씨구- 이제는 그런 당위성 주장까지 하고 너 꽤 강렬해졌구나!”


“응. 카페인이 주는 각성을 통해서만이 이 신경들에 잠식당하지 않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언니는 드립용 주전자를 내려놓고 드리퍼를 머그에서 덜어낸 뒤 그녀 앞으로 잔을 가져다주었다.


“자- 아주 원 없이 마시렴. 너 그러다가 나중에 죽을 때도 한 번 만에 못 죽을 거다. 커피를 하도 많이 마셔서 자꾸 깨어나가지고. 아유 무서워라, 징그러워라. 난 그 꼴은 못 보니 넌 꼭 내 뒤에 가야 된다!”


자매는 눈을 마주 보고 서로 웃었다.






“….. 신경이 항상 무겁고 피곤해..”


“얘, 사방이 이렇게 가로막혀서는-“ 언니가 입을 열었다.


주전자의 물은 이미 다 드리퍼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언닌 커피 하난 정말 기가 막히게 내리지-“


“말 돌리지 말고”


“언니, 언니야- “


”응.”


“나 그래도 정말로 살만 하다.”


“넌 말이지, 넌 정말로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니? 내가 한 번 다시 짚어줄까? 넌 비밀이 많은 아이였어. 어려서부터.”


비밀이 많은 아이. 여자는 침묵하는 가운데 비밀을 도대체 어디에 다 담아두고 있었던 것일까. 이미 그렇게 자라 버리고 난 뒤의 일이라 여자 제 자신도 미처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응 그랬을지도 몰라. 왜냐하면 드러내서 좋을 것 없는 게 많은 아이였으니까.”


언니는 집요했다.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끈덕진 고집마저 감지되는 기세 등등한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라면 이제 그만 털어놓도록 해-' 하고 언니는 종용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분명히 '어서 말해-' 하고 채근질 하고 있었지만 어느 한 구석이나마 '그래, 나는 무조건 네 편이야-' 하는 자상함은 묻어나지 않았다. 그게 바로 언니다. 언니는 정말로 그런 사람이므로.


“기억하고 있는 거니? 벌써 2년은 더 되었을 거야. 네가 그 겨울밤에 시체처럼 대문 앞 가로등 밑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날. 그위로 눈이 몇 센티는 쌓여있었을 거야. 우리 모두를 당혹게 한 날.”


“응, 그래 기억나.”


집요함과 단호함을 넘어서 언니는 여자를 종용하고 싶었다.


“이제쯤은 좀 진지하고 자세해질 수는 없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