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창문 없는 방>
여자는 손가락을 벌려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그러다 윗니로 아랫입술을 한 번 불안하게 내리누르더니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가 말해주면 이제 언니는 나를 어떻게 할까?”
그 겨울밤의 기억을 잊지 않는다. 잊을 수 없는 밤이었기 때문이다. 여자가 그토록 원했던 처벌의 시간이었으나 정화의 시간은 되지 못한 것만 같아 내내 여자를 놓아주지 않았던 기억이다.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 밤이었다. 검은 밤을 가르는 흰 눈송이들이 조금씩 굵어져가고 있었다. 여름철에는 모기들과 나방들이 윙윙거리며 맴도는 가로등 주변이 한겨울에는 흩날리는 눈송이의 요염한 자태를 클로즈업해 주는 훌륭한 조명이 되어 준다. 여자는 그렇게 가로등 아래서 눈의 결정을 보기라도 하듯 실눈을 뜨고 초점을 맞추려 했다.
부러 밖에 나가 가만히 서서 내리는 눈을 맞고 싶은 밤이기도 했다. 머릿속을 모두 포맷시킬 수 있을 만큼 밖은 엄정하게 시렸다. 시리게 추웠다. 제대로 외투를 갖춰 입지 않고 홑 껍질 공단 슬립 같은 잠옷바람으로 달랑 나온 여자가 견딜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10분 정도였을 테니까. 여자는 그 깊은 밤에 그런 차림으로 몽유병 환자처럼 뜨적뜨적 맨발로 대문을 열고 걸어 나갔다. 조명 아래 가 설 기세 하나는 등등했다. 모노드라마가 곧 시작될 예정이다. 자, 보아라 그리고 여자는 방백이라도 할 참이었던가. 여자는 벌을 좀 서고 싶었는데 매도 맞고 정신도 차려서 다 씻겨 내려가고 없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기에는 영하의 밤은 아무 생각이 없고 아무 말도 아무 계획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눈발만 뿌려댔다.
눈발이 이마를 스치고 코에 내려앉았다가 차가운 물이 되어 녹아 증발했다. 그러면 코 끝에는 물이 흐른 자국만큼 다시 엷게 얼음이 얼렸다. 피부가 모조리 얼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도 시원하고 좋지 않은가, 하고 여자는 입까지 벌리고 고개를 들고 온 얼굴로 눈을 맞았다. 내일 아침 당장 감기에 걸려 있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지금 벌을 서고 있는 거니까. 내일 아침 그냥 죽어있어도 좋아.
“언니, 나는 그렇게 새 하얀 눈을 매처럼 맞으며 내 더러워진 순수를 회복할 작정이었어.”
순수의 회복이라는 작업은 더디게 이루어지는 것이었을까? 여자는 자조적인 웃음을 띠며 언니에게 말했다. “성냥팔이 소녀처럼 다음 날 아침에 집 대문 근처에 덩그러니 그렇게 발견될 마음은 조금도 없었어. 나는 단지 벌을 서야 했는데, 또 벌을 서면서도 눈이 너무 예쁘게 내려서 그걸 몰래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렸던 거야. 그 형벌의 밤을 고스란히 지냈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순수하지 않아. 내 순수는 더러워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지도 몰라.”
조용한 가운데 언니는 분명 울고 있었다. 그녀가 여자 앞에서 울음을 울었다. 흐느끼고 있었다. 눈물을 보였다. 이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도대체! 뭐가 널 그렇게 만든 건데에? 응? 내 말 듣고 있지? 응? 제발….!”
“그해 가을, 내가 응급실에 실려갔던 날이었어.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응급실에 누워있었고, 나를 옮겨다 준 사람들이 내 휴대전화에 찍혀있는 그 사람 전화번호로 연락을 했대. 사실 그때 엄마가 올 수도 있었고 아빠가 올 수도 있었고 언니가 올 수도 있었는데. 전부 다들 그때 따라 부재중이었대.
내가 아직도 옛날폰을 써서. 보통 0번부터 3번 정도까지는 단축 번호로 가족이나 애인을 저장하니까 그렇게 차례대로 눌렀는데 세상에 난 예외 없이 집, 엄마, 아빠, 언니 하고 뜨더래. 예외 없이 말이야. 예외 없이. 그렇게 순서대로 눌러서 그다음에 나온 그 사람이 올 수밖에 없었던 거래.
그런데 차라리 잘 되었지 뭐야. 딸이 왜 쓰러져 실려왔고 무슨 일을 당한 건지를 가족들이 모를 수 있도록 비밀 보장이 알아서 이루어진 거니까. 나 아주 오라졌지? 그 와중에도 감쪽같이 완전범죄 할 수 있을 거라고 들떴었나 봐. 그렇게 언니 말대로 또 하나의 비밀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지. 나는 그때, 그 응급실 베드에 누워서 그 사람하고 꽤 많은 말을 나눈 것 같아. 마디마디 마다는 그다지 긴 문장들은 아니었지만.”
그 일이 있은 지는 이제까지 한 2년이 되었을까. 1년은 분명히 훨씬 더 지나버렸으니 그래, 한 2년쯤 되었을 모양이다 체감했었다. 아니 차라리 한 십수 년쯤 지나서 케케묵어 기억도 안나는 그런 일이면 좋겠어, 아니 것보다 그냥 아주 일어난 적 조차 없던 일이었다면 좋겠어. 것도 아님 그냥 남의 얘기였음 좋겠어. 여자는 2년 전부터 지금까지 이 일을 차라리 이렇게 남의 집 이야기쯤 되는 것 마냥 생각하기로 하며 살아왔지만, 생각을 바꾸려고 하면 할수록 여자는 더욱 생각에 갇히고 말았다.
그 뒤 그 겨울 새하얀 눈밭에 가로등 불빛 아래 모로 누워 동사 직전으로 발견되고나서부터 가족들과도 멀리 떨어져, 생전 안 하던 짓들만 골라서 하겠다고 작정을 한 여자를 모두가 그저 속수무책 지켜보고만 있었다.